우리는 나이드신 어른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오랫동안 지속된 우리의 삶터에 녹아있는 선현들의 정신과 지혜로움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어른들의 삶의 교훈이 자연스럽게녹아있는 매개체가 우리가 가까이 접하고 있는 자연마을, 곧 동성마을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느낌을 받는 것처럼, 이곳에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을 초입에서 받는 느낌도 매우 다양하다. 왜냐하면 마을의 모습은 마을을 구성하고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의성IC에서 빠져 나와 도리원(桃李院)에서의성 방향으로 약 2km 달리다 보면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남대천이 흐르고、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기슭양지쪽에 일단의 와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 펼쳐진다. 이곳은 조선중기 이래 명망있는 가문으로 발돋음하여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의성읍과 봉양면(鳳陽面) 일대에 세거하여온 구미리(龜尾里)의 아주신씨(鵝州申氏) 집성촌이다. 옛지명은 의성군 금뢰면(金磊面), 구장(龜莊), 구호(龜湖)라고도 불리다가 마을 뒷산이 거북 등과 꼬리모양을 한 채 남대천으로 흘러내리는 형상을 하여 구미로 명명하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마을에서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지혜와 이야기가 있다.
아주신씨집성촌에서의 오봉종택(梧峰宗宅)은 오봉사당과 낙선당(樂善堂)이 함께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87호로 일괄 지정되었으며 신지제신도비(申之悌神道碑)、금산서원(錦山書院)、죽애정(竹厓亭)、감애정(鑑厓亭)、삼지당(三知堂)、창암정(蒼巖亭)등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재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묵직한 느낌으로다가오는 건축물 낙선당은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1562~1624)의 아들 신홍망(申弘望1600~1673)이 강학을 목적으로 1691년에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71년에 후손 신정기(申正其)에 의해 중수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오봉사당은 종택과 낙선당 중간 약간 뒤쪽 높은 곳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오봉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해마다제향하고 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1976년에 세워졌다.
의성의 아주신씨가의아주는 고려 말 거제속현(巨濟屬縣)이었던 아주현(鵝州縣)으로 현재는 거제시(巨濟市) 아주동(鵝州洞)으로 지명이남아 있다. 의성에 오랫동안 세거하고 있는 아주신씨는 바로 이곳의 권지호장(權知戶長:고려, 조선시대향리직의 우두머리)이었던 신영미(申英美,아주신씨 시조)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의성에 세거하게 된 것은 4세손 신윤유(申允濡)대 부터이다.
윤유의 초명은원유(元濡)로 고려 말 판도판서겸군기시사(判圖判書兼軍器寺事)를 역임하였고, 일찍이거창(居昌)에 세거하다가 상주(尙州)지역에서 고려의 망함을 보고 애통해 하며 초하루 보름에 그 곳산에 올라가 개경을 향해 충절을 지켰다 하여 후에 그 산을 망경산(望京山:해발 499m)이라 불렀으며 오늘날에는 만경산(萬景山: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산)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후에 이곳의성군 단밀면(丹密面)으로 이주하면서 아주신씨 의성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그의아들 우(祐)는 고려 말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부친을 모시고 친분관계가 있는야은 길재(冶隱 吉再)와 함께 낙향했는데, 길재는 선산, 우는 상주 망경산 아래 정착하여 일체 벼슬길에 나아가지않은 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런 친분관계로 우의 아우인 면의 딸은 길재와 혼인하게 된다.
우(祐)는 효행이 지극하여 『삼강행실록』에 실렸고 마을이 효자리(孝子里)가 명명되는 연유가 되었다.현재 단밀면 주선리(注仙里)에는 효자비가 있고, 속암리(速岩里)에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슬하에 광부(光富、內府令公派:邑派)와 광귀(光貴、鳳州公派:龜派)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의성읍과 봉양 구미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면서읍파(邑派)와 구파(龜派)로 나눠지게 되었고 이들 또한 많은 걸출한 인물과 전적을 남기게 된다.
❚ 내부령공파(內府令公派、邑派)
내부령공파는우(祐)의 장자 광부(光富)를 중시조로 하는 가계로서 의성 아주신씨 가에서는 읍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실제 광부대 부터 의성읍에 세거하였던 것은 아니다. 윤유가 거창에서 의성군 단밀로 이거한 뒤로 우(祐)→광부→사렴(士廉)대까지는 상주 망경산 아래 단밀에서 살았기에 의성읍으로 이거한것은 사렴의 아들 석명(錫命)대이다. 윤유 이하 사렴까지의 묘소는 모두 단밀에 있고, 단지 사렴의 묘만단밀에서 의성읍으로 이봉(移封)하였다. 이는 석명이 의성에 정착하여 그의 부의 묘를 세거지인 의성읍으로 천장(遷葬)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읍파가 된 셈이다.
읍파가 번창하게되는 것은 석명의 증손인 회당 신원록(悔堂 申元祿、1516~1576)부터라고한다. 효자로 이름났으며 그의 형 원복(元福)과 더불어 8년간이나 지성으로 병중의 아버지를 간호하였고, 어머니를 위하여 연친곡(宴親曲)8수를 지었다고 전한다.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게 나아가종유(從遊)하였고 이러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후진양성을위해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설립하는 등 학문진흥과 향약실천에힘썼다고 한다.
반가의 반열에오른 아주신씨 가문에서는 현재까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들이 꽤 많은데, 그 중 무덤의 위치를새긴 지도판인 분산도판(墳山圖板)이 있다. 그리고 이 분산도판으로 찍은 분산도, 일명 ‘묘도(墓圖)’라고 하는데원록의 문집인 회당집(悔堂集) 끝부분에 실려 있으며, 이 묘도가 가리키는 곳은 현재 경북 의성군 비안면 고도산이다. 일반적으로묘도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을 그린 경우가 많았고, 묘의 위치와 명당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회당집을 묶은 후손들은 “세월이 흘러 조상의 묘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일이 있을 때 이를 보고 묘를 찾으라!”고 이 묘도를 싣게 된 연유를 밝혔다.
또한 원록은슬하에 심(伈, l547~l615)과 흘(仡、l550~1614)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형제 모두 임진왜란 시 그들의 종질인 홍도(弘道、1558~1611)와 함께 예안의 광산김씨 후손인 김해(金垓)의 의병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심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흘은 좌승지를 증직 받았다.
홀(仡)은 적도(適道:1574~ 1663)·달도(達道:1576~1631)·열도(悅道:1589~1659년) 등걸출한 인물 3남을 두었다. 특히 열도(悅道:1589~1659)는 호가 나재(懶齋)이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수학했고, 1624년(인조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를 호종하였고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예조정랑·사간원 정언을 거쳐1638년에 울진현감(蔚珍縣監), 1647년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냈다. 저서로『선소지(仙笑志)』,『의성지』의 전신『문소지(聞韶志)』를펴냈다.
읍파의 통혼관계를보면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안이나 안동권씨(安東權氏), 영양남씨(英陽南氏), 함안조씨(威安趙氏), 함양박씨(威陽朴氏), 영천이씨(永川李氏)등 대개 의성과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고을의 사족들과 인척을 많이 맺고 있었다.
특히 학문적으로영남의 거유(巨儒)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으로써 향촌사회의학문진흥과성리학적 질서에 따른 전통유지에 힘쓰는 것과 동시에 명망 있는 사족가문으로서의사회 ·경제적 기반, 신분적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고볼 수 있다.
❚봉주공파(鳳州公派、龜派)
봉주공파는우(祐)의 둘째 아들 광귀(光貴)를 중시조로 하는 가계이다. 봉주공파라 부르게 된 것은 광귀가 황해도지봉주사(知鳳州事:鳳州는 황해도 봉산(鳳山)를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봉주공파는내부령공파인 읍파에 대하여 구파라 불리는데, 이는 이 가계가 의성 봉양면의 구미리를 중심으로 대대로세거하여 왔기 때문이다. 윤유→우→광귀→희신(希信)→건(乾)까지는 상주 관할의단밀(現 의성군 단밀면)에 세거하였다.
10세손 개보(介甫)대에 비로소 의성군 봉양면 상리동(上里洞)으로 옮겼고, l4세손인지제(之悌)대에 현재의 봉양면 구미리에 세거하게 되었다.
구미리의입향조 지제(之悌 : 1562~1624)는 자가 순부(順夫), 호가 오봉(梧峰)·오재(梧齋)로 증조는증창례원 판결사 한(翰)이며,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이며, 어머니는 월성박씨(月城朴氏)로민수(敏樹)의 딸이고, 부인은함안조씨(咸安趙氏)로 지(址)의 딸이다.
일찍이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機)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l601년에 정언(正言)과예조좌랑을, 이듬해에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등을거쳐 1604년 세자 시강원(世子 侍講院) 문학(文學)·성균관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오봉집(梧峰集)』이 있으며 1610년 장대리(藏待里)에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사후 1663년에 후진을기르던 강당에 스승을 경모하는 뜻으로 사당인 경현사(景顯祠)가창건되었고, 이어 장대서원(藏待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서원 명은 당시 의성현령이었던 여헌 장현광이「장기어신대시이동(藏器於身 待時而動):몸에 기국을 감추고 때를 기다려움직여야 한다.」이란 현판을 써서 내걺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서원 역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6년에 중건되었으며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배향되었다. 또한 지제는 의병장 김해(金垓) 장군이 경주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자 그의 처자식을 맡아 보살펴주어, 忠과義를 실천함에 훈훈한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아주신씨 가문은 서로 배우고 본받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늘 충효와 의를 실천하였기에 직계와 방계의 가계가 거의 각 서원에 배향되어 있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각박한 이 시대에 가슴으로 전하는 본보기가되고 있다.
오봉(梧峰) 신지제의 아들 홍망(弘望、1600~1673)은 자가 망구(望久),호가 고송(孤松)으로 1627년(인조 5) 진사시에합격하고 강릉(康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정언·전주판관·지평·풍기군수·울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으며 장현광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저서로 『고송집(孤松集)』을남겼다.
읍파(邑派)와 구파(龜派)의 주요 고문서 종류들은 다양하며 특징적인 부분이 많다.
조선시대백성들이 관청에 청원이나 진정서를 제출한 문서인 소지류(所志類)라든지종중 사람들의 조의록(弔儀錄)을 기록한 애감록(哀感錄), 제사나 묘위(墓位)·계사(稧事) 등에 대하여논의한 사항을 기록하여 그것을 서로 지키도록 약속하는 문서인 재사완의(齋舍完議)도 있다.
이러한 고문서중 특히 구미구보신장도목완의(龜尾舊洑新粧都目完議)는 마을에서구미보(龜尾湺)를 축성하고 주도한 것으로 신지제가 구미에입향하여 세거하게 되면서 마을의 몽리답(蒙利畓)에 물을 댈수 있도록 할 뜻으로 길부촌(吉夫村) 앞에 구미구보(龜尾舊洑)를 축조하고 관리하는 부분들을 의논하여 적은 내용들이다. 이 보의 완성으로 인근 7~8개 동의 농장에 관개할 수 있었다. 보의 관리는 아주신씨 문중에서 주관하고 매년 돌아가면서 도감(都監)하되 타성(他姓)은 허락하지않았다. 애초에는 입역(立役)이나 수세(水貰)가 전혀없었으나, 기유년 이후 신씨 종가에서 수세하게 되어 1두락당 5량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비록 신씨 후손들이라하더라도 마땅히 여러 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입역과 수세를 내도록 한다는 완의이다. 아주신씨 문중이 미래를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문서라고 꼽는다.
그리고 동도회안(同道會案), 내제(內題)는 「제영남동도회제명권(題嶺南同道會題名卷)」으로 1601년(선조 34) 당시 영남 출신의 관료들이 장악원(掌樂院)에 모여 시를 지은 것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등재된 27인 중에는 예조정랑 지제교 신지제(申之悌), 승문원 저작 이민성(李民宬),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이민환(李民寏)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부인조씨불망기(貞夫人趙氏不忘記)는 신지제의 처 정부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상을 당하여 자 홍망이 기록한 것이다. 표지에는 「천계 경인년 종천록 정부인조씨불망기(天啓 庚寅年 終天錄貞夫人趙氏不忘記)」로 되어 있으며 1563년(명종 18, 계해)에 태어나 1650년에 졸하여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분구(1677~1745)의 상사 때 조문객들의 명단을 정리한 고위불망기(考位不忘記: 佳道谷祔葬位)도 있다. 거기에기록된 조문객은 의성 인근 마을을 비롯하여 상주·영천·경주·양동·제천·인동·성주·선산 등 다양하다. 또한상례 과정을 기록한 불망기인 임술년종천록(壬戌年終天錄)에는내력과 준비 과정 및 신분구의 셋째 사위인 유재춘(柳載春)의제문과 장사시의 부조 내용도 기록하여 당시 향촌사회의 교유관계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