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一世) 신영미(申英美)
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웃대는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아주지역(鵝洲地域)에 호족(豪族)으로 거주하여 왔던 것으로 여느 지방 호족과 마찬가지로 성(姓)이 없었는데 고려조에 들어와서 성을 가졌다. 성을 가진 후 토착지역아주를 성의 본관으로 삼았고 향직(鄕職)인 호장(戶長)을 수임(受任)하였다. 호장은 지역주민의 수장(首長)이었고 중앙관서(中央官 署)의지방행정(地方行政)을 대신하여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자손들은 음직(蔭職)에올랐다. 음직은 조상의 덕으로 벼슬 자리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子)는 진승(晋升)이다. 고려조에 등 장한 여느 성씨도 그렇듯 시조의 부인에 관한 것은잘 기록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배(配)는 알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부인은 실전(失傳)으로전해왔다. 고려 중기 때까지 시조의 부인을 기록한 것은 사실에서 벗어난 것으로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는것이다.
2세(二世) 진승(晋升)
관직(官職)은 산원동정(散員同正), 산원은고려 때 2군6위(二軍六衛)에 소속된 정8품의 무관(武官)벼슬이다. 고려 초기에는 의흥친군(義興親軍)의 십위(十衛)에 소속된역시 정8품의 품계의 무관관직이었다. 여기에 동정(同正)이란 직위도 있는데 이것은 산원보다 높은 정5품(正五品)의 무관벼슬이고대개 향리(鄕吏)에게 제수되었다. 특히 음직으로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처음 받는 벼슬로 이동정직부터였다. 배(配)는 실전(失傳).
3세(三世) 득창(得昌)
관직은 영동정(令同正)이다. 고려에서전교시(典校寺), 사복시(司僕寺), 전객시(典客寺)등의관청 부서에 둔 벼슬인데 이 벼슬의 품계는 최고 3품 품계에서 최하9품까지로 두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각 부서 우두머리로 종5품에속했다. 전교시는 각종 도서(圖書)와 인쇄에 관한 업무를 보는 관서였고 사복시는 왕이 사용하는 가마 와 말을 관리하는 관청이며 전객시는 외국의사신을 영접하고 조공(朝貢)문제 같은 것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배(配)는 실전(失傳).
4세(四世) 윤유(允濡)
초명은 원유(元濡)라고 하였다. 관직은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 배(配)는 지평직(持平職)에 있은 이언(李堰)의 여식(女息)이다. 역사서 동사찬(東史纂)에보면 고려 충열왕(忠烈王) 6년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승선(承宣) 신윤유(申允濡)의 본래휘(諱, 이름)는원유(元濡)였는데 충선왕의 이름 자와 음이 같다고 하여 윤(允)자로 바꾸었다. 당시왕명에 의해 왕과 같은 이름의 글자를 금하는 법령이 있었다. 판도판서는 재상급 관직으로 조선시대 호조판서(戶曹判書)와 같은 직위이다. 나라안의 호구(戶口)와 조세(租稅), 공부(貢賦), 재정(財政)을 맡는 관청의 장(長)이었다. 승선(承宣)은 나라의 명령을 하달하고 궁궐을 호위하고 군사 관계의 기무를 맡는 중추원(中樞院)이란 관청의 정3품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여기에 좌승선(左承宣), 우승선(右承宣)이 있었다. 군사 병기를 만들고 보관하는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의 검교(檢校)라는 직책도 맡았는데 이것은 임시직이었다. 아주신씨의 선대가 남겨놓은 사적기(事蹟記)에 다음과 같은 글귀의 한자(漢字)의 한 원문이 있는 것을 본다.
按東史纂曰高麗忠烈王六年正月壬辰要以左承宣申允濡本諱元濡避忠宣王嫌名謜字代以允除版圖判府判書兼軍器寺別檢校事….
안동사찬왈고려충열왕육년정월임진요이좌승선신윤유본휘원유피충선왕혐명원자대이윤제판도판부판서겸군기시별검교사
이 원문의 내용은 동사찬(東史纂)에 보면 고려 충열왕6년정월 임진에 좌승선 신윤유가 본래의 이름이 원유(元濡)인데충선왕의 이름자 원(謜)과 같아 대신에 윤(允)의 글자로 썼고 판도판서 겸 별도로 군기시에 있었다 하는 내용인것이다.
※ 주(註): 동사찬(東史纂)은 동사요찬(東史要纂), 동사찬요(東史纂要)라고도한다. 신라와 고려의 역사가 기록된 책이다. 조선 선조 때오운(吳溪)이 엮은 것이다.총 8권 8책.
5세(五世) 우(祐)
관직은 봉상대부사헌부장령(奉常大夫司憲府掌令)과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을 역임하였다. 봉상대부는고려의 문관벼슬로 정4품의 품계이다. 충열왕 때 제정된 대부大夫)벼슬이었다. 사헌부장령은 문무文武)양쪽의공직자들을 감찰하는 업무와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기관에 소속된 관직(官職)이란 것이다. 종4품에해당했다. 전라도안렴사는 전라도 지역을 안찰按擦)하는 직무이고품계는 종3품에 속했다. 신호위 호군은 신호위라는 군 부서(部署)에 소속된 정 4 품의무관벼슬이 다. 신호위는 고려의 육위(六衛)의 하나로 7개의 군영(軍營)을 거 느리는 부대였다. 위(衛)는 군(軍)의 부서를 표시한것이다. 특히 우(祐)는효자로 유명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의 문헌에 보면 관직은 호군이었는데 고려말 혼탁한 세상사에 스스로 몸가짐에 조 심했고 물러나서는 부모에 효도하기를진력하였다.
부(父) 판서공(判書公)이 졸(卒)하였을 때는 묘 앞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조석(朝夕)으로 곡(哭)을 했다. 그런데 대나무 두 그루가 분묘 앞에 자란 것을 보았다. 이것은 효도에 감동한 소치였다는 소문이 났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지고 노변(路邊)좌측에 효행을 기록한 효자비가 섰다. 그래서 그 지역을 효자리(孝子里)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 관동리(舘洞里)이다.(註 : 단밀현은 현재 의성군 지역이다. 그러나 관동리는 상주시 외서면지역이다. 당시의 의성은 현(縣)으로 상주목(尙州牧)에소속되어 있었으므로 단밀현을 상주지역으로 표기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 효성을 기려 묘우(廟宇)를현 북쪽 1리 지점에 지어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하였다. 배(配)는 류씨(柳氏)로 약목(若木)의 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류익정의 여식이며, 묘(墓)는 동쪽 10리 사포(蛇浦) 서향원(西向原)에 있다. 이 유적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官至奉常大夫司憲府掌令全羅道按廉使神虎衛護軍輿地勝覽三綱行實皆曰官至護軍公處麗末混濁之世玉立朝端廉潔自持事父母盡孝父判書公卒公廬墓三年朝夕號哭有二竹生于墳前人以爲孝感所致事聞旌閭立石于所居里路左刻曰孝子里卽今尙州丹密縣舘洞里也後人追墓其至行立廟于縣北一里許號曰涑水書院配柳氏若木崑山府院君益貞之女墓在縣東十里許蛇浦充向之原
관지봉상대부사헌부장령전라도안렴사신호위호군여지승람삼강행실개왈관지호군공처여말혼탁지세옥립조단렴결자지사부모진효부판서공졸공여묘삼년조석호곡유이죽생우분전인이위효감소치사문정려입석우소거리로좌각왈효자리즉금상주단밀현관동리야후인추묘기지행립묘우현북일리허호왈속수서원배유씨약목곤산부원군익정지녀묘재현동십리허사포충향지원
우(祐)는 유교도덕의 기본이 되는 3가지 즉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사이에 지켜야 하는 도리를 잘 지켰다고 소문 난 위인(偉人)이었다. 상주땅에서는 그의 효(孝)에 감동하여 짐짓 부(父)의묘전(墓前)에 쌍죽(雙竹)이 자랐다. 우(祐)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도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공은 특히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李成桂)와막역한 사이로 친 구지간 같이 지냈는데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관직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고려의 신하였으므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심정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나공이 비록 관직을 받지 않았으나 이성계는 공에게 형조판서(刑曹判書)라는재상자리를 하사(下賜)했다.」
우(祐)를 기리는 배향(配享)의 서원(書院)은 상주(尙州)의 속수서원(涑水書院)과 검암서원(儉岩書院), 개성(開城)에는 표절사(表節祠)라는 사우(祠宇)가 있다. 조선조 인조 6년(1626)에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었던 정경세(鄭經世)가쓴 묘표(墓表)의 글이 있다. 이 글 내용에서도 우(祐)의효(孝)에 관한 행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묘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상주관할단밀현(尙州管轄丹密縣) 가까이 작은 석비(石碑)가노좌(路左)에 서 있는데 그 석비(石碑)에 기록(記錄)되기를 효자리(孝子里)라하였다. 옛 어른들이 상전(相傳)하여 안렴사신공(按廉使申公)께서계시던 곳이라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가 공경(恭敬)하였다. 삼가히 살피건데 공(公)의 휘(諱)는 우(祐)이고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장령(掌令)에이르렀고 곧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었다. 려조(麗朝)의 고사(故事)를 보면 때에 따라 군왕측근(君王側近)의 신하(臣下)를 파견(派遣)하여 각도(各道)의 산천(山川)의 제사(祭祀)와 백성(百姓)들의 풍속(風俗)을 물으며수령(守令)의 유명(幽明)과 출척(黜陟)하는 것을안렴사(按廉使)가 하였다고 한다. 대개 필요(必要)한 때에선발(選拔)하였다. 공(公)이 혼탁(混濁)한 세상(世上)에 처(處)하자 능(能)히 몸가짐을 깨끗이 하고 부모(父母)를극진히 섬겨 효도(孝道)하니 부(父)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휘(諱) 윤유(允濡)였다. 돌아가시매여막(廬幕)을 짓고 삼년(三年)을 조석(朝夕)으로 묘전(墓前)에서 통곡(痛哭)하였는데 묘전(墓前)에대나무 두 그루가 자랐다. 이것을 본 그때 사람들은 효성(孝誠)에 감동(感動)되어 나왔다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報告)되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비(碑)를 세웠는데 효자리(孝子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이 사실(事實)은 국사(國史)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이다. 공(公)이 이자(二子)를 두니광부(光富)와 광귀(光貴)였다. 광부(光富)가 이자(二子)를 두니사윤(士贇)과 사렴(士廉)이었다. 사렴(士廉)이 언양현감(彦陽縣監)을하였다. 그의 현손원록(玄孫元祿)은 또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공(公)의 팔세손(八世孫)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인 달도씨(達道氏)가 본인(本人)과는 친구(親舊)로서 매우 가까웠는데 하루는 가장(家狀)을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우리 가장의 선조(先祖)께서 別世하신지 이미 수백년(數百年)이라 의관(衣冠)을 소장(所藏)한 곳이 계시던 동편십리(東便十里) 밖 사포리서향(蛇浦里西向)의들판이니 묘도(墓道)의 표지(標識)가 없고 자손(子孫)들이 또 멀리 흩어져 살아 전성(展省)을 때에 능(能)히 하지못하고 때가 오래 되어 무너지고 초군(樵軍)과 목동(牧童)들이 혹간 무덤에 올라가고 하는 것이 두렵고 비록 자손(子孫)일지라도 그 곳을 알지 못할 수 있고 더욱이 조상(祖上)의 뛰어난 행적(行蹟)이 전(傳)하지 못할법도하니 어찌 슬프고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하며 족형승지공(族兄承旨公)(지제(之悌))이 계실 때 여러 동종(同宗)과 더불어 벌석(伐石)을계획하여 부갈(趺碣)을 갖추기로 하였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고별세(別世)하였으니 이제 원(願)하건데 공(公)이 우리 조상(祖上)에대한 말씀을 새겨서 조상(祖上)의 덕(德)을 후세(後世)에 알게 하면 그 은혜(恩惠)가크리라 하고 절하며 청(請)하니 本人은 안렴사(按廉使)의 효성(孝誠)은 이미 귀신(鬼神)이감동(感動)하고 세상(世上)에 빛났는데 사람들의 이목(耳目)이있으면 어찌 모르리오 하고 거칠고 옹졸한 내가 글로 전(傳)할수 있으랴 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나는 상향(上鄕)의 말학(末學)이며 공(公)의 또 외예(外裔)라 도리상(道理上) 사양(辭讓)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가장(家狀)을 상고하여 서술(叙述)하니 우(右)와 같이 조정(朝廷)에계신 것과 관직(官職)의 차서(次序)와 거가행의(居家行誼)는 연대(年代)가 이미멀고 문적(文蹟)의 증거(證據)가 없어 상세(詳細)히기록(記錄)하지 못하고 그 자손(子孫)이 많아서 또 다 기록(記錄)하지 못하며 대략 좌(左)와같이 기록(記錄)하니 현재조정(現在朝廷)에 있는 분은 문학군(文學君)과 그의 형 적도(適道)는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이며 동생 열도(悅道)는 예조좌랑(禮曹佐郞)이며 그의 족형승지공(族兄承旨公)의이름은 지제(之悌)인데 문행(文行)으로 이름높고 대과(大科)를 하였으며 사림(士林)이중망(重望)하였다. 부행(不幸)히 장수(長壽)하지 못하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홍망(弘望)인데 진사(進士)였다. 문학군(文學君)의 아들의 이름은 재(在)와규(圭)이다. 준수(俊秀)하고 온아(溫雅)하였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바가 또한 마땅히 적지 않은 지라신씨(申氏)의 복(福)이 쇠(衰)하지 아니하도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효자(孝子)가 끊어지지 아니함에 길이 너의 류(類)를 줄 것이며 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만년(萬年)토록 길이복(福)과 자손(子孫)을 준다 하니 이것이 바로 공(公)을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아! 아름답고 위대(偉大)하도다.
※ 주(註)
掌令(장령): 고려시대 감찰기관인 사헌부(司憲府)의종4품벼슬.
侍講院(시강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고도 한다. 다음에왕이 될 왕세자에게 유교경전을 가르치고 유교적 도덕관을 갖게 하는 일을 맡은 관청.
文學(문학): 시강원 소속의 정5품 벼슬.
趺碣(부갈): 비석을 세우는 것.
末學(말학): 후학(後學)이란 말과 같은 것으로 뒤에 학문을 하였다는 뜻.
外裔(외예): 외갓집쪽 후예라는 뜻.
察訪(찰방):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에서 역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종6품 벼슬.
禮曹佐郞(예조좌랑): 국가의 의례와 외교를 맡은에조 관청의 정6품 벼슬.
文學君(문학군): 시강원의 문학 관직에 있는신달도(申達道)를 지칭한 것.
원문은 다음과 같다.
尙之轄丹密縣傍有小石碑立路左刻曰孝子里故老相傳以爲按廉使申公所居也過者敬之謹按公諱祐仕高麗官至掌令嘗爲全羅道按廉使麗朝故事以時分遣近侍于諸道祭告山川廉問民俗黜陟守令之幽明名之曰按廉使盖極一時之選也公處昏濁之世能皎潔持身事父母盡孝父版圖判書諱允濡卒廬墓三年朝夕號于墓有雙竹生于墓前人以爲孝感事聞旌閭以孝子名其里事在國乘及輿地勝覽公有二子曰光富光貴光富有二子曰士贇士廉士廉爲彦陽縣監其玄孫元祿又以孝行趾公美旌閭公之八世孫今侍講院文學達道氏與余友甚善一日以家狀示余而言曰吾先祖歿己數百年矣衣冠之藏在所居東十里許蛇浦兌向之原而墓道無表子孫又散居遠地展省不能以時恐遂久湮夷樵牧或登丘隴則雖雲仍亦不得識其處?其卓絶之行又將泯泯無傳豈不非且懼哉族兄承旨公在世時曁余諸同宗謀伐石具砆碣未及樹而歿今願得公一語而剞劂之使先德顯於後則爲賜大矣敢拜以請余惟按廉公之孝誠旣己感鬼神而斡造化赫赫在人耳目奚待蕪拙而傳顧余尙鄕之末學而於公又外裔也於義有不得以辭者遂攷其狀而敍之如右其立朝歷官次序及居家行誼年代己遠而文蹟無徵不得以詳焉其子孫衆多亦不能盡錄略書于左見今在朝者文學君及其兄適道詳雲道察訪弟悅道禮曹佐郞其族兄承旨公名曰之悌有文名取大科爲士類所重不幸而不克壽有子名弘望進士文學君有子名在圭皆俊秀而溫雅余所未及知者當亦不少申氏之祿蓋未爻也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又曰君子萬年永錫祚胤非公之謂也耶嗚呼休哉
상지할단밀현방유소석비입로좌각왈효자리고노상전이위안렴사신공소거야과자경지근안공휘우사고려관지장령상위전라도안렴사여조고사이시분견근시우제도제고산천염문민속출척수령지유명명지왈안렴사개극일시지선야공처혼탁지세능교결지신사부모진효부판도판서휘윤유졸여묘삼년조석호우묘유쌍죽생우묘전인이위효감사문정려이효자명기리사재국승급여지승람공유이자왈광부광귀광부유이자왈사윤사렴사렴위언양현감기현손원록우이효행지공미정려공지팔세손금시강원문학달도씨여여우심선일일이가장시여이언왈오선조몰기수백년의의관지장재소거동십리허사포태향지원이묘도무표자손우산거원지전성불능이시공수구인이초목혹등구롱칙수운잉역부득식기처황기탁절지행우장민민무전개불비차구재족형승지공재세시기여제동종모벌석구부갈미급수이몰금원득공일어이기궐지사선덕현어후칙위사대의감배이청여유안렴공지효성기기감귀신이알조화혁혁재인이목해대무졸이전고여상향지말학이어공우외예야어의유부득이사자수고기장이서지여우기입조역관차서급거가행의연대기원이문적무징부득이상언기자손중다역불능진록약서우좌견금재조자문학군급기형적도상운도찰방제열도예조좌랑기족형승지공명왈지제유문명취대과위사류소중불행이불극수유자명홍망진사문학군유자명재규개준수이온아여소미급지자당역불소신씨지록개미효야시왈효자불궤영석이류우왈군자만년영석조윤비공지위야야오호휴재
조선조 영조 41년(1765)에 춘추관사(春秋館事) 채제공(蔡濟恭) 선생이 쓴 비명(碑銘)에서도고려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의 행적을 보게 된다. 비는 사포유허비(蛇浦遺墟碑)이다.
단밀(丹密)은 상주(尙州)의 한 마을로위치(位置)가 굳어지고 작아서 세상(世上)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관동표비(館洞表碑)에 쓰여 있기를 효자리(孝子里)라 하였다. 냇물이마을앞을 흐르니 효수(孝水)라고 하였다. 효수(孝水)위에 우뚝선 것은 속수서원(涑水書院)이다. 그리고 고려조(高麗朝) 안렴사신공(按廉使申公)께서 옛날에 여기에 살으셨다.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사대부(士大夫)들이 예의(禮儀)로운 풍속(風俗)은 없고삼년복(三年服)을 입는 자(者)가 없었으며 비록 박상충(朴尙衷)과같은 훌륭한 분은 범인(凡人)에 초월(超越)했다. 그리고 조정(朝廷)에서도 소식(疎食)하는데 부과(不過)하였다. 공(公)의 성품(性禀)이 지효(至孝)하여 부상(父喪)에 삼년(三年)을 여묘(廬墓)하여 주야호곡(晝夜號哭)하니묘전낙루처(墓前落淚處)에 쌍죽(雙竹)이 생하다. 그래서사람들은 효감(孝感)이라 하였다. 이 사실(事實)이 조정(朝廷)에 報告되어 정려(旌閭)가 내렸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自身)을 잃지 아니하고 그 부모(父母)를섬기는 사람은 나는 들었으나 자신(自身)을 잃고 능(能)히 그 부모(父母)를 섬기는 사람은 나는 듣지 못했다고 하셨다.> 공(公)께서는 고려말(高麗末) 혼탁(混濁)한 대(代)를 만나 일찍 안렵사(按廉使)가 되어 오로지 호남지방(湖南地方)의수령(守令)들의 척강(陟降)을 꾀하였고 그 후고향(後故鄕)에돌아와 일생(一生)을 마치시니 그 속이 관관동리(館館洞里)이다. 여지지(輿地誌)에 말하기를 깨끗한 몸이며 행(行)과 장(藏)은 능(能)히 그 도(道)를 지녔다고 하였다. 아! 공(公)께서 사친(事親)에 극진지효(極盡至孝)하니 어찌 그 몸만이 잃지 아니함이 아니라 그로서 극치(極致)에 이르렀다. 공(公)께서 별세(別世)하신지사오백년(四五百年)이라 계속 밀성(密城)에는 효자(孝子)의 뒤가 서로 이으니 서원(書院)과여각(閭閣)이 서로 바라보도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公)으로부터일어남이라 하다. 지금도 공(公)의 자손(子孫)들이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로 이어옴이 아름답다. 지금 가장 드러난 분을 말할진대 원복(元福)께서는 효우(孝友)로 조정(朝廷)에 추천(推薦)되어 처음으로 벼슬에 임명(任命)되고 원록(元祿)께서는지극(至極)한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하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봉향(奉享)하다. 적도(適道)와 달도(達道)와 열도(悅道)는 함께 효우(孝友)로 사림(士林)이 경망(敬望)하고 적도(適道)는 인조시정묘정축란(仁祖時丁卯丁丑亂)에창의(倡義)하고 달도(達道)는 화의(和議)를 물리쳤고열도(悅道)는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죽기를 맹세하다. 흥효(興孝)는 효행(孝行)으로 밀성지속록(密城誌屬錄)에기록(記錄)되었고 지효(之孝)는 임진란(壬辰亂)에 별세(別世)하였으며 절박(切迫)함에 이르러 혈서(血書)를아우에게 부쳐 나라를 위해 죽음을 권(勸)하였다. 그 아우는 지제(之悌)인데효우덕행(孝友德行)이 있어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봉향(奉享)되다. 그리고 지익(之益)과 심(鐔)과 협(鋏)은 모두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하다. 홍망(弘望)은 효우(孝友)와 청직(淸直)으로 이름 높고 렴(濂)은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니 효행(孝行)때문이다. 아! 어찌 그렇게 창성(昌盛)한가. 공(公)께서 속수서원(涑水書院)에봉향(奉享)한 것은 우복(愚伏)과 창석(蒼石)과 사서(沙西) 여러 선생께서 실지주관(實地主管)하셨고 우복(愚伏)께서그 묘비문(墓碑文)을 지었으니 그로써 천양(闡揚)함에 유감(遺憾)이 없도다. 공(公)의 제손(諸孫)이 산거(散居)하고 그 계시던 곳이 유구(悠久)한지라 혹흔적(或痕迹)이인몰(湮沒)할지라 벌석(伐石)하여 표석(表石)을 세우려고몇 세손도통씨(世孫道通氏)가 천리장정(千里長程)을 달려와 제공(濟恭)에게 그 사실(事實)을기록(記錄)하여 줄 것을 부탁(付託)하니 제공(濟恭)이 지음에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역사(役事)에 후세(後世)사람들이 그 여(閭)를본받음 이 그 사람을 본받음만 같지 못하고 그 사람을 본받음이 그 마음 을 본받음만 같지 못하며 그 마음을 본받음은 또 백행지원(百行之源)에 于先 됨이 없더라 그러니 사람들로 하여금 이 密城을 지나는者가 이 비석(碑石)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사모(思慕)하고 그 사람을 사모(思慕)함으로써 그 마음에 이르게 되니 향당(鄕黨)과 주리(州里)와 나아가서방국(邦國)에 이르기까지 확실(確實)히 의표(儀表)가 될 것이다. 백행지원(百行之源)을 일으켜 많은 현인(賢人)이이르게 되면 이 역사(役事)는 반드시 세상(世上)사람들을 인도(引導)함이 확실(確實)할 것이다. 그리고 풍속(風俗)을교화(敎化)하는데 크게 도움될 것이다. 제공(濟恭)이 어찌 감(敢)히 사양하리요. 공(公)의 휘(諱)는 우(祐)이며 아주인(鵝州人)이라 그 부(父)의 휘(諱)는 윤유(允濡)이며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니 정직(正直)하고 절의(節義)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비교(比較)하기를 송(宋)나라 당개(唐介)라고 말하였다. 명(銘)에 어지러운 세상(世上)에 살지 아니하니 행적(行蹟)이어찌 그렇게 깨끗하며 사람으로 분수(分守)를 다하니 행실(行實)이 어찌 그렇게 돈독(敦篤)하랴 여기는 오직 신안염공(申按廉公)의옛마을이라 공(公)의 미풍(美風)을 듣는 사람은 이를 본받고 이를 지키리라.
※ 주(註)
春秋館事(춘추관사): 조선시대 국정(國政)에 관한 기록을 맡은 관청의 고위직.
館東表碑(관동표비): 관동리에 있는 비석이라는뜻.
陟降(척강): 승진시키고 강등시키고 하는 것.
行(행)과 藏(장): 행동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뜻함.
闡揚(천양): 잘 알려지는 것.
湮沒(인몰): 사라지는 것.
伐石(벌석): 돌을 채취하는 것.
百行之源(백행지원): 온갖 행동의 원천.
鄕黨(향당)과 주리(州里): 여러 집단과 여러 고을.
邦國(방국): 국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丹密尙之陬也地僻而偏宜無以章於世然有所謂館洞里碑之曰孝子里川橫其前稱之曰孝水川之上巋然而立者曰涑水書院蓋以麗朝按廉使申公嘗居於此也竊稽麗乘士大夫無禮俗未有服三年者雖以朴尙衷賢其所以自異於人者不過食素朝堂耳公性至孝父卒終三年廬墓朝夕號于前淚血至地有雙竹生墓前人以爲孝感事聞旌其閭孟子曰不失其身而能事其親者吾聞之矣失其身而能事其親者吾未之聞也公當麗季昏濁嘗以按廉使專制湖南黜陟巳而歸田里以終其身卽館洞里是己輿地誌曰皎潔其身行藏能得其道嗚呼公之能事親盡其孝者豈非不失其身有以致之者耶公歿殆四五百年環密城孝子踵相接綽楔相望識者謂自公發之至若公之裔孫皆以孝友趾其美今以最著者言之曰元福以孝友薦朝廷授一命曰元祿至孝旌閭享藏待書院曰適道曰達道曰悅道俱以孝友爲士林望而適道當仁祖丁卯丁丑倡義師達道斥和議悅道扈駕南漢常以死自誓曰興孝以孝載密城誌屬錄曰之孝死壬辰倭刀臨絶血書寄弟勉死國弟曰之悌有孝友德行享藏待書院曰之益曰鐔曰鋏皆以孝旌閭曰弘望以孝友淸直稱曰濂贈持平以孝嗚呼何其盛也공(公)之享涑水書院也愚伏蒼石沙西諸先生實主之而愚伏表其墓所以闡揚之無憾公之諸孫猶以公所居里久或湮沒謀伐石以文之幾世孫道通氏千里走京師屬濟恭記其事濟恭作而曰懿哉斯役也後之人式其閭不如師其人師其人不如師其心師其心又莫先於百行之源如使人之過密城者因是石而慕其人慕其人以及其心鄕以州州而國洞洞焉興於百行之源克底於比屋可封則是役也未必不爲之倡也其有補於風敎大矣濟恭何敢辭公諱祐鵝洲人也公之父諱允濡官版圖判書有直節人比之唐介云銘曰亂邦不居跡何其潔也爲人盡分行何其篤也是維申按廉故里聞公之風者是效是則
단밀상지추야지벽이편의무이장어세연유소위관동리비지왈효자리천횡기전칭지왈효수천지상규연이입자왈속수서원개이여조안렴사신공상거어차야절계여승사대부무례속미유복삼년자수이박상충현기소이자이어인자불과식소조당이공성지효부졸종삼년여묘조석호우전루혈지지유쌍죽생묘전인이위효감사문정기려맹자왈불실기신이능사기친자오문지의실기신이능사기친자오미지문야공당여계혼탁상이안렴사전제호남출척사이귀전리이종기신즉관동리시기여지지왈교결기신행장능득기도오호공지능사친진기효자개비불실기신유이치지자야공몰태사오백년환밀성효자종상접작설상망식자위자공발지지약공지예손개이효우지기미금이최저자언지왈원복이효우천조정수일명왈원록지효정려향장대서원왈적도왈달도왈열도구이효우위사림망이적도당인조정묘정축창의사달도척화의열도호가남한상이사자서왈흥효이효재밀성지속록왈지효사임진왜도임절혈서기제면사국제왈지제유효우덕행향장대서원왈지익왈심왈협개이효정려왈홍망이효우청직칭왈렴증지평이효오호하기성야공지향속수서원야우복창석사서제선생실주지이우복표기묘소이천양지무감공지제손유이공소거리구혹인몰모벌석이문지기세손도통씨천리주경사속제공기기사제공작이왈의재사역야후지인식기려불여사기인사기인불여사기심사기심우막선어백행지원여사인지과밀성자인시석이모기인모기인이급기심향이주주이국동동언흥어백행지원극저어비옥가봉칙시역야미필불위지창야기유보어풍교대의제공하감사공휘우아주인야공지부휘윤유관판도판서유직절인비지당개운명왈난방불거적하기결야위인진분행하기독야시유신안렴고리문공지풍자시효시칙
조선 순조 25년(1825)에 후손 신체인(申體仁)이 쓴 사적기(事蹟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내용에서는 아주신씨의 시조와 상계그리고 우(祐)의 하계를 소상히 알게 된다.
선조(先祖)의 휘(諱)는 우(祐)이며 성(姓)은 신씨(申氏)니 계통(系統)은 아주(鵝洲)에서 나왔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영미(英美)니 권지호장(權知戶長)이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진승(晋升)이니 산원동정(散員同正)이고조(祖)의 휘(諱)는 득창(得昌)이니 영동정(令同正)이고 고(考)의 휘(諱)는 윤유(允濡)니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충렬왕조(忠烈王朝)에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였다. 청렴(淸濂)으로 유명(有名)하고 곧은 절개(節介)로 당세(當世)에 들어났다. 모든 사람들은 송(宋)나라당개(唐介)와 비등(比等)하다 하였다. 원(元)나라 황제(皇帝)가 우리나라에서올린 표문(表文)이 공경(恭敬)치 못하다 해서 명령(命令)하여표문(表文) 한 사람을 고(告)하라 하니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하여 가지 않으려 하였다. 판서공(判書公)이 몸소 나서서 여쭈어 말하기를 <나라의 일에 가(可)히몸을 위(爲)할 수 없다.다만 남의 신하(臣下) 된 자(者)가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을 피(避)하지 아니하고 왕직(王職)에 따름이 진실(眞實)로그 분수(分守)를 다하는 것이다. 지금 조정(朝廷)의 제신(諸臣)들이 쥐가 두려워 하고 이리가 돌아보듯 스스로 모면(謀免)함을 다투고 자신(自身)을 보전(保全)함이 천김(千金) 같이 중(重)할지라도 나라 위(爲)함을잊어버리기를 마치 헌 집 같이 천(賤)하게 여기면 나라는장차(將次) 어떻게 보존(保存)하리요. 신(臣)은 청(請)하건데 나라를가벼이 여기고 자신(自身)을 사랑하는 무리를 처벌(處罰)하여 그 나머지를 독려(督勵)하고 일에 능(能)하고전담(專擔)할 사람을 보내서 그로 하여금 우환(憂患)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하니 왕(王)이 가납(嘉納)하였다. 이 사실(事實)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비(妣)는 성주(星州)이씨 지평(持平)인 언(堰)의 따님이다. 선조(先祖)께서 상주단밀현 관동리(尙州 丹密縣 館洞里)에 거주(居住)하여 효(孝)와 청렴(淸濂)으로 벼슬에나아가 봉상대부 사헌부 장령(奉常大夫 司憲府 掌令)으로 전라도(全羅道) 안렵사(按廉使)하다. 충혜왕(忠惠王) 이년(二年) 신묘(辛卯)에 신호위 보승 섭호군(神虎衛保勝 攝護軍)에 임명(任命)되었다(금존교지(今存敎旨)하다). 고려 고사(高麗 故事)에근신(近臣)을 제도(諸道)에 파견(派遣)하여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에 제사(祭祀)하고 민풍(民風)을 살펴서 자기(自己) 뜻대로 한 지역(地域)을감독(監督)하여 유명(幽明)에 따라 시진강등(是進降等) 또는파면조치(罷免措置)하니 이러함을 안렵사(按廉使)라 하니 지금의 어사(御史)와 관찰사(觀察使)와 같다. 청준(淸峻)하고 중망(重望)이 있지 아니한 자(者)는 절대(絶對)로 응선(應選)되지 아니한다. 선조(先祖)께서 염개(廉介)하고 正直하여 家庭으로부터 臺憲에 出入함에 同官者가 놀라고 緊縮되었다. 節義를살피고 교화(敎化)를 펼치며 탐관오리(貪官汚吏)는 해임(解任)시켰다. 말세(末世)의 정란(政亂)에 이르러그 때의 일들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또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을 굽어보며 부끄럽게 여겨 은거(隠居)하여 멀리 떠나니 사람들이말하기를 혹(或)은 조정(朝廷)에 있어서 풍채(風采)가일대(一代)에 명성(名聲)을 떨쳤다고 말하고 혹(或)은풍상(風霜)을 씻었으니 당음(棠蔭)이 어사(御史)의 절의(節義)에 빛났다고말하고 혹(或)은 마음을 숨기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도리(道理)를 좋아하였다고 말하였다. 선조(先祖)께서 부모(父母)를 섬김에 지극(至極)히효도(孝道)한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니 판서공(判書公)이별세(別世)함에 여묘 삼년(廬墓三年)하며 조석(朝夕)으로통곡(痛哭)하니 피눈물이 땅에 스며들어 대나무 두 그루가묘전(墓前)에 솟아났다. 사람들은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함이라 하고 이 사실(事實)이조정(朝廷)에 보고(報告)되어 정려(旌閭)가 내렸다. 사는 마을을 이름하기를 효자리(孝子里)라 하니 이 사실(事實)은고려사(高麗史)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기록(記錄)되어 있다. 지금(至今) 유허지(遺墟地) 길 곁에 작은 석비(石碑)가있는데 효자리(孝子里) 석자가 새겨져 있으니 이것으로 알만하다. 정려(旌閭)를 표(表)할 때에 세운 것으로 그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효자리(孝子里)를 더욱 공경(恭敬)하였다. 동(東)으로 상거(相距) 몇 리(里) 밖에 동명(洞名)이 있는데 청신(淸慎)한 판서공(判書公)의 묘(墓)가 일찍부터 이 동리(洞里)에있다고 하나 세대(世代)가 멀고 기록(記錄)과 묘갈(墓碣)의 증거(證據)가 없어불행(不幸)히 그 묘(墓)를 실전(失傳)하게 되었다. 지금 단밀(丹密) 사람들이서로 전(傳)하기를 여묘(廬墓)살이 하던 마을이라고 말들을 한다. 선조(先祖)의 묘(墓)는 효자리(孝子里)의 동방십리(東方十里)밖의 사포리 태향(蛇浦里兌向)의 산(山)에있다. 우복 정선생(愚伏 鄭先生)이 묘도(墓道)를 표기(表記)한데 말하기를 혼탁(昏濁)한 세상(世上)에 능(能)히 교결(皎潔)로써 몸가짐을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公)의 효성(孝誠)은 귀신(鬼神)이 감동(感動)하고 주장(主掌)한 조화(造化)의 빛남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다. 그 후(後)에 우복(愚伏)과 창석(蒼石)과 사서(沙西) 여러 선생(先生)이 강론(講論)하여 경현사(景賢祠)를 건립(建立)하고 사(祠)의 이름을 속수서원(涑水書院)이라 하였다. 학사 김선생(鶴沙金先生)이 지은 봉안문(奉安文)에 말하기를 근본(根本)을세우면 도리(道理)가 생기고 정성이 지극(至極)하면 귀신(鬼神)이 감동(感動)한다 하고호서 진사 홍석기(湖西 進士 洪錫箕)께서 지은 쌍죽도(雙竹圖) 노래에 말하기를 큰 절의(節義)로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여 어사대(御史臺)에서 일찍 꽃다운 명성(名聲)을날렸고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은 또 귀신(鬼神)도 알고지신(地神)도 들어나는 바가 있으니 이에 효자(孝子)의 마음은 대나무로 더불어 그 정조(貞操)를 알 수 있다. 단밀(丹密)은 선조(先祖)로부터 이후(以後)로 효자(孝子)가 많은 곳으로 이름났고 지금 마을거리에 특이(特異)한 자취가 많으며 이어서 작설(綽楔)을 세워 서로 바라보니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 선조(先祖)로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배(配)는 약목류씨(若木柳氏)니곤산부원군(崑山府院君) 익정(益貞)의 따님이다. 이자(二子)를 두었으니 장(長)은 광부(光富)니 내부령(內府令)이고 차(次)는 광귀(光貴)니 지봉주사(知鳳州事)다. 내부(內府)가 유자(有子)하니 사윤(士贇)의 후손(後孫)은 유허지(遺墟地)에 살고 사렴(士廉)은언양현감(彦陽縣監)하다. 언양(彦陽)이 유현손원복(有玄孫元福)하니 참봉(叅奉)이며 효우(孝友)로 이름났다. 원록(元祿)은 증참의(贈叅議)며 호(號)는 회당(悔堂)이니 효행(孝行)으로 공(公)을 더욱 빛나게하고 또 여묘 삼년(廬墓 三年)으로 표정려(表旌閭)하고 의성 장대서원(義城藏待書院)에 봉향(奉享)하다. 참봉(叅奉)이 증손(曾孫)을 두니 류(瑠)는 문과(文科)하여 현감(縣監)인데 청백(淸白)으로 이름났다. 회당(悔堂)이 유자(有子)하니 심(伈)은 감찰(監察)이며 흘(仡)은 증승지(贈承旨)하고효우(孝友)로 이름났다. 흘(仡)이 유자(有子)하니 적도(適道)는 찰방(察訪)이며 호(號)는 호계(虎溪)니 정묘(丁卯)와 정축(丁丑)에 창의(倡義)하다. 달도(達道)는 수찬(修撰)으로 증승지(贈承旨)하고 호(號)는 만오(晩悟)니 정묘(丁卯)에 척화(斥和)하다. 열도(悅道)는 정언(正言)이며 호(號)는 나재(懶齋)니 효우(孝友)와 문장(文章)으로 이름났다. 만오(晩悟)가 유자(有子)하니 재(在)는 태인현감(泰仁縣監)하고 규(圭)는 문과좌랑(文科佐郞)하다. 태인(泰仁)이 유손(有孫)하니 렴(濂)은 효(孝)로 증지평(贈持平)하다. 봉주(鳳州)가 유자(有子)하니 희신(希信)은 단양군수(丹陽郡守)며 희충(希忠)은 하동현감(河東縣監)이며 그리고 희경9希敬)이다. 단양(丹陽)이 유증손(有曾孫)하니개보(介甫)는 사직(司直)이며 용보(用甫)는 과천현감(果川縣監)이고 명주(命周)는 부여현감(扶餘縣監)하다. 현감(縣監)이 유현손(有玄孫)하니 겸(謙)이다. 참봉(叅奉)이 유자(有子)하니 응상(應祥)은 참봉(叅奉)이고 사직(司直)이 유자(有子)하니 간(幹)은 직장(直長)이며 한(翰)은 증판결사(贈判決事)이다. 직장(直長)이 유자(有子)하니 백령(百齡)이고 참봉(叅奉)이 유손(有孫)하니 격(格)과 檢과 건(楗)이고 참봉(叅奉)이 유증손(有曾孫)하니 지예(之禮)와 지형(之亨)은 직장(直長)이며 지인(之仁)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이며지익(之益)은 참봉(叅奉)이다. 모병(母病)으로 손바닥에 불을 켜고 하늘에 기도(祈禱)하였다. 지인(之仁)의 자(子)는 협(鋏)이니 친병(親病)으로 매가 꿩을 잡아왔다. 지익(之益)의 자(子)인 심(鐔)은 왜적(倭賊)이 아버지를 공격(攻擊)함에몸으로 칼날을 받았다. 三人이 함께 孝 정려(旌閭)를 받았다. 判決의 子는 응규(應奎)니 참봉(叅奉)으로 증참판(贈叅判)하고 참판(叅判)의 자(子)는 몽득(夢得)이니 증승지(贈承旨)이고 승지(承旨)의 자(子)는 지효(之孝)니 선비들의 추중(推重)을받아 문소지(聞韶誌)에 기재(記載)되었다. 임진년(壬辰年) 왜적(倭賊)의 칼에 죽음에 임박(臨迫)하여혈서(血書)를 동생(同生)에게 부쳐 나라 위해 죽기를 힘쓰라 하였다. 지제(之梯)는 문과(文科)하여 승지(承旨)로 임진훈(壬辰勳)에 기록(記錄)되었다. 증참판(贈叅判)하고 호(號)는 오봉(梧峰)이니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을 갖추었고지극(至極)한 효행(孝行)으로 여묘(廬墓)하며 역시(亦是)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지신(之信)은 효우(孝友)로 이름나 역시 문소지(聞韶誌)에 기재(記載)되었다. 오봉(梧峰)의 자(子) 홍망(弘望)은 문과정언(文科正言)이며호(號)는 고송(孤松)이니 여헌문하(旅軒門下)에유학(遊學)하다. 보는이들이 춘풍화기(春風和氣)라고 말하였다. 과천(果川)의 자(子)는 춘연(椿年)이니 참봉(叅奉)이고 참봉(叅奉)의 자(子)는 섬(暹)이니 용궁현감(龍宮縣監)하다. 그 나머지는능(能)히 다 기록(記錄)하지 못하니 이제 아주(鵝洲)로써성(姓)을 삼은 씨족(氏族)을 이룬 자(者)는 다안렵사(按廉使)가 조상(祖上)이다. 슬프다! 우리 선조(先祖)께서는 세상(世上)에 초월(超越)하고 인륜(人倫)의 지조(志操)가 빼어나 비록 지위(地位)는경상(卿相)에 이르지 못했으나 마침내 빛나는 일을 전개(展開)하고 청관(淸官)과 현직(顯職)을 역임(歷任)하였고 나아가서 가성(家聲)을 계승(繼承)하고 풍치(風致)가 음연(凜然)하여 충분(充分)히 사람을감동(感動)시켰고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을 후세(後世)에 드리워 자성(子姓)과 향당(鄕黨)이 서로계승(繼承)하여 흥기(興起)하고 실행(實行)하니 평일(平日)의 지극(至極)한 행실(行實)과 아름다운덕(德)을 생각하면 우(右)와 같이 기록(記錄)한바에 그칠 수 없다. 그 나머지 자신(自身)을 단속함과 가정(家庭)을통솔(統率)함과 조정(朝廷)에서 벼슬에 있으며 전후사적(前後事蹟)이 뛰어나고 위대(偉大)함이전(傳)할 것이 많으리라 생각되나 시대(時代)가 너무 멀고 문적(文籍)에 증거(證據)가 없으니이제 표덕(表德)과 이력(履歷)과 생졸월일(生卒月日)을모두 可히 기록(記錄)하지 못하니 자손(子孫)들 남은 한(恨)이 진실(眞實)로 다함이없으리라. 옛날에 수찬공(修撰公)이 일찍이 가상(家狀)을가지고 가 모표(墓表)를 정선생(鄭先生)께 요구(要求)하여 마땅히 남긴 초고(草稿)는있으나 빠뜨려서 전하지 못하니 제종부형(諸宗父兄)이 서로함께 탄식(嘆息)하다가 이에 체인(體仁)이 견문(見聞)이 적고 말단후손(末端後孫)으로어찌 충분(充分)히 잠긴 빛을 일으켜 들어내리요. 그러나 두루 찾고 지극(至極)히상고하여 오직 옛 문헌(文獻)에 나타나고 기록(記錄)된 바를 여기에 발췌(發萃)하여 감(敢)히 붙임으로써상고됨이 없지는 아니하니 삼가히 내후(來後)에 재취(裁取)하기를 기다리노라.
※ 주(註)
權知戶長(권지호장): 고려시대 지방 관직의 하나. 주로 지역 호족세력의 수장에게 준 향직.
散員同正(산원동정): 고려시대 군(軍)의 정8품 벼슬.
嘉納(가납): 왕이 신하의 건의를 받아 주는말.
持平(지평): 고려시대 어사대(御史臺)의 벼슬. 조선시대사헌부의 정5품 벼슬.
奉常大夫(봉상대부): 고려시대 문관 벼슬에서정4품에 속하는 벼슬 품계.
是進降等(시진강등): 진급하는 것과 강등하는것.
觀察使(관찰사): 고려시대 각 도에 둔 우두머리벼슬 종2품의 관직이다.
臺憲(대헌): 어사대와 사헌부.
墓碣(묘갈): 묘비.
兌向(태향): 똑 바른 방향.
皎潔(교결): 달빛처럼 티없이 깨끗하다.
主掌(주장): 어떤 일을 오로지 맡는 것.
綽楔(작설): 작설지전(綽楔之典)의 약어(略語). 나라에서 충신, 열녀, 효자집안에 정 려문을 세워주는 것.
內府令(내부령): 나라안의 재물을 맡아 보는관직.
知鳳州事(지봉주사): 황해도 봉산군수 관직.
斥和(척화): 화평(和平)을 배척하는 것.
正言(정언): 조선시대 왕에게 직간하는 관청인사간원(司諫院)의 정6품벼슬.
司直(사직): 정5품 벼슬. 음직으로 주로 받는 관직.
司宰監正(사재감정): 궁궐에서 쓰는 물품을 관리하는관청의 정3품 벼슬.
直長(직장): 여러 관청의 종7품 벼슬.
判決事(판결사): 조선시대 각종 조정행사를 맡은장례원(掌禮院)의 정3품벼슬.
聞韶(문소): 의성(義城)의 별칭.
淸官(청관)과 顯職(현직): 청백리와 높은 관직.
子姓(자성): 같은 성을 갖고 있는 후손이라는뜻.
鄕黨(향당): 자기가 사는 곳.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先祖諱祐姓申氏系出鵝洲高祖諱英美權知戶長曾祖諱晋升散員同正祖諱得昌令同正考諱允濡仕高麗忠烈朝官版圖判書淸名直節表顯當世人比之唐介元皇帝以東國表?不敬徵撰表人人皆畏避不行判書公挺身進啓曰國事無可爲巳凡爲人臣者不避夷險以循王職是固其分今廷臣鼠畏狼顧爭自謀免思全身若千金之重忘爲國若幣廬之賤如是而國將何保臣請斬輕國愛身之輩以厲其餘遣能事專對之人使不生患王嘉納事在麗史妣星州李氏持平堰之女先祖居尙州丹密縣館洞里以孝廉進官奉常大夫司憲府掌令全羅道按廉使忠惠王二年辛巳拜神虎衛保勝攝護軍謹按以則當稱敎旨年朝攷夫麗史忠惠王後五年甲申高麗故事遣近侍于諸道祭名山大川糾察民風專制一方黜陟幽明是爲按廉使如今御史觀察使非淸峻有重望者未或應選也先祖廉介正直得自家庭出入臺憲寮寀震縮按節宣化貪汚解印及世季政亂見時事日非羞與俯仰高蹈遠引人之者或謂立朝而風采震一代之聲或謂風霜儷塗棠映御史之節或謂甘心韜晦得行藏之道也世傳治隱携手同歸而無公與顯籍可据不敢直書先祖事親至孝出於天性判書公卒廬墓三年朝夕號泣血淚徹土雙竹生墓前人謂孝感事聞旌閭名所居里曰孝子里事在麗史及輿地勝覽續三綱行實今遺墟路傍有小石碑刻孝子里三字知是旌表時所建過者加敬孝子里西西當作東距數里有洞名淸愼判書公墓嘗在是洞而世代寢遠誌碣無徵不幸失其墓至今密人相傳爲居廬洞云先祖墓在孝子里東十里許蛇浦兌向之原愚伏鄭先生表墓道曰昏濁之世能以皎潔持身又曰公之孝誠感鬼神斡造化赫赫在人耳目其後愚伏蒼石沙西諸先生又議立景賢祠祀之號曰涑水書院鶴沙金先生撰奉安文曰本立道生至誠感神湖西進士洪錫箕作雙竹圖歌略曰湖節旣化俗柏臺曾蜚英至孝神亦知地祗有所呈乃知孝子心與竹同其貞密自先祖以後號多孝子至今閭里間多異蹟繼起綽楔相望論者謂自吾祖發之也配若木柳氏崑山府院君益貞女有二子長曰光富內府令次曰光貴知鳳州事內府有子曰士贇後孫居遺墟曰士廉彦陽縣監彦陽有玄孫元福叅奉以孝友稱元祿贈叅議號晦堂孝行趾公美亦居廬三年旌閭享義城藏待書院叅奉有曾孫瑠文科縣監以淸白稱悔堂有子伈監察仡贈承旨稱孝友仡有子適道察訪號虎溪丁卯丁丑倡義達道修撰贈承旨號晩悟丁卯斥和悅道正言號懶齋孝友有文章晩悟有子在泰仁縣監圭文科佐郞泰仁有孫濂以孝贈持平鳳州有子曰希信丹陽郡守曰希忠河東縣監曰希敬丹陽有曾孫介甫司直用甫果川縣監命周扶餘縣監有玄孫謙叅奉有子應祥?奉司直有子幹直長翰贈判決事直長有子百齡叅奉有孫格檢楗?奉有曾孫之禮之亨直長之仁司宰監正之益叅奉母病炷掌祈天之仁有子鋏親病鶻擊雉之益有子鐔倭擊父以身受刃三人幷以孝旌閭判決有子應奎叅奉贈叅判叅判有子夢得贈承旨承旨有子之孝有士望載聞韶誌死壬辰倭刃臨絶血書寄弟勉死國之梯文科承旨錄壬辰勳贈叅判號梧峰有德行文章至孝廬墓亦享藏待書院之信以孝友稱亦載聞韶誌梧峰有子弘望文科正言號孤松遊旅軒門見稱以春風和氣果川有子椿年叅奉叅奉有子暹龍宮縣監其餘不能盡錄今以鵝洲爲氏者皆祖於按廉嗚呼我先祖以超世拔倫之操雖未得致位卿相究展所蘊然歷敭淸顯追繼家聲風裁凜然有足動人百行之源垂範後世子姓鄕黨相繼興行想平日至行懿德不止如右所記者其餘律身御家立朝居官前後事蹟想多超偉可傳而時代絶遠無籍可据至如表德履歷及生卒月日幷不可記子孫之追恨固無窮意昔修撰公嘗齎狀求墓表於鄭先生宜有遺草而逸不傳諸宗父兄相與發歎乃命體仁脾修狀錄一通體仁以寡聞末裔何足以闡發潛光而旁搜極攷惟舊籍所顯載者是採不敢附以無稽謹俟裁取於來後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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