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台佐는 안동 河回가 아니라 외가인 서울의 羅洞에서 출생했다. 모부인이특이한 꿈을 꾸고 공을 낳으니 외조부가 이 아이는 “千里駒로 西厓에게 그 후손이 있다”고 하면서 칭찬했다. 7세에 백부인 畏齋公에게 나아가 수학하니 文義가夙達하여 畏齋公이 사랑하였으며 소문이 무성하여 가까운 인척으로 樊巖 蔡濟恭을 배알하니 樊巖이 학식을 시험해 보고는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칭찬하였다.갑인에 謁聖試 堂兄인 豊安君과 함께 뽑혔고 3일 뒤 庭試 丙科에 올라 임금의 讚賞을 받았다. 그리고 『中庸講義』ㆍ『大學』ㆍ『朱書故寔』ㆍ『國朝故寔辨』을 지어서 바치기도 하였다. 注書, 正言을 거쳐 持平이 되고 이어 扶餘縣監으로 나가 많은 치적을올리게 된다. 修撰을 거쳐 副校理로 있을 때에 어버이 병으로 사직하고 이어 北評事에 제수되어 가는 길에금강산을 둘러보고 임지에 가서 야박한 풍속을 교화하고 養士廳을 세워 면학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司成, 修撰에 제수되고 安邊府使로 나가 화재로 소실된 武庫를 재건하고 兵仗器를 마련한다. 學舍를 정비하여 공부하는 곳으로 만들며 장례를 지낼 때 모여서 음주하고 가무하는 풍습을 혁파하니 백성들이 감화를받아 크게 기뻐하였다. 그 뒤에 獻納, 司成, 軍資監正, 修撰, 校理를역임했다. 특히 校理를 할 때에 寓軒公의 後嗣가 零替함에 제사를 오래도록 받들지 못하자 일가들과 의논하여別廟를 세우고 遺稿를 간행하며 묘소에 비석도 세웠다. 겨울에는 玉署에 들어갔는데 이 때 날씨가 몹시추운데도 임금께서 經筵에 부지런히 납시니 동료들은 병을 핑계로 회피했으나 공은 수고롭다고 여기지 않고 여러 날을 獨對하니 동료들도 참된 侍講이라고칭찬하고 당시의 宰臣들도 “지금 조정에 誠心奉公하는 사람은 柳學士 한 사람 뿐이다”고 칭찬했다. 그 뒤 어버이 봉양을 위해 요청하니 玄風縣監을 제수하였다. 先公의 병이 위독함에 극진히 간호했으나 초상이 나자 고향으로 返葬하여 제반 상례절차를 예법대로 실시하였다. 이어 司成, 司諫, 校理에제수되고 通政에 올랐으며 金海府使로 나가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고 文士들을 모아 학문하는 기풍을 진작시켰다. 임오년 6월에 同副承旨가 되고 겨울에 侍講院 輔德이 되었는데 이 해에 豊安君과 상의하여 義庄을 두고 모든 일가를 먹이는세금에 대응하고 또 利息을 떼어 가난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일을 하니 鄕黨이 모두 감복했다. 갑신년 여름에『樊巖集』을 간행하고 을유년에 또 輔德에 제수되자 사직상소에서 聖學에 힘을 쏟을 것을 진술하고 上이 또 同副承旨 司饔院正을 시켰으나 곧 遞職되었다. 무자년 겨울에 輔德에 제수되고 기축년 정월에 陳賀할 때 禮貌官으로 嘉善大夫 副摠管에 이르고 2월에 焚黃告由하러 귀향하였고 겨울에는 漢城右尹에 제수되었다. 경인년에右承旨가 되고 禮曹와 戶曹의 參判으로 옮겼고 신묘년에 同經筵에 제수되고 이어 敦寧同義禁府가 되었으며 겨울에 愚伏 鄭經世의 年譜와 舊譜를 改刊하였으며거처하는 청사를 고쳐 和敬堂이라 하고 그 記文을 지었다. 정유년 가을에 陶山書院에서 退溪文集을 중간하고士林의 천거로 洞主가 되고 간행하지 못한 책 12권을 찾아내어 간행하려고 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질병으로和敬堂에서 考終하니 향년 75세였다..
●해제
鶴棲 柳台佐의 문집. 20권 10책.
序文과 跋文이 없어서 정확한 문집간행 내역을 알기가 어렵다. 문집의구성은 대체로 10行 21字 20卷 10冊, 각 책별로 2권씩 일률적으로 배정한 楷書木版本이다.
柳台佐는 총명한 자질과 빼어난 학문으로 출사하여 주로 학문하는 곳인 弘文館 등에서 근무하였는데 특히 抄啓文臣으로임금의 『中庸』과 『大學』에 대한 조목별 질문에 정연한 논리로 應對한 저작을 남긴 것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외에도몇몇 고을에 지방관으로 나가 관리 본연의 임무인 백성들을 잘 보살펴 민생을 풍요롭게 만든 치적을 올렸다. 벼슬을물러와서도 선현들의 서적을 간행하고 후생들을 지도하는 등 선비로서의 자세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陶山書院의 院長이 되어 退溪의 문집을 重刊하고 나머지 未印刊한 서적을 印出하려다가 질병으로 逝去하니 享年 75세였다.
그의 문집을 보면 일반적인 문집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문집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것은 바로 『中庸』 33장에 대한 『中庸講義條對』와 『大學或問』ㆍ『大學故寔』ㆍ『朱子大全故寔』ㆍ『國朝故寔』등 국왕의 경전 전반에 걸치는 조목별 질문에 대한 탄탄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으로 응한 답변과 사실에 대한 辨正力 등이다. 이러한 경우는 여타의 문집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柳台佐 문집만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하겠다.(姜求律)
●기사해제
학서선생문집권지이십(鶴棲先生文集卷之二十) / 附錄 祭文(附錄 祭文)
○ 外弟申冕周 45(外弟申冕周 45)
생전에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면서 따르던 鶴棲의 죽음을 두고 그간의 지낸 정의와공의 행적을 서술하고 아울러 비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