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安 下溪里에서 태어난 저자는 형제가 다섯이었는데, 모두 어려서부터재주가 있었다. 5세 무렵에 농민들이 보리 타작을 하는 것을 보고,‘도리깨로 보리 이삭을 세 번 두들기니, 이삭이 하늘로 날아오르네[打麥有三鞭天走]’라는 시를 읊자, 조부는 ‘여러 손자들의 시 짓는 솜씨가 모두 볼 만 하지만 이 아이(저자)는 높이 날아오를 기상이 있다’며 기뻐했다. 가학으로 경전과 역사서를 배워 스스로 학문을 터득했으며 글재주가 출중하여 장래를 촉망받았다. 從兄 廣瀨 野淳(1755~1831), 특히 仲氏 梅竹軒 宅淳에게오래도록 머물며 스승으로 섬겼다.
25세(178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부친의 명을 받들어 성균관에 진학했다. 하루는正祖께서 성균관 식당에 왕림하여 저자를 돌아보며 ‘용모가 단정하여 반드시 재목으로 쓰일 것이라’며 칭찬하였다. 이 때 항상 族姪 新野 仁行(1758~1833)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36세(1794년)에 모친상을 당했고, 이어 39세(1797년)에는부친상을 당했다. 42세(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자 애도했다.
43세(1801년)에 增廣 文科에 급제하였다.
45세(1803년)에 栗峯都察訪을 제수받았다.
48세(1806년)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2월에 예조좌랑으로 옮겼다. 그 해 5월에 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이어 7월에는 교리가 되었다가10월에는 司諫院 正言이 되었다. 50세(1808년)에는 副修撰이 되었다. 그 해 7월에北評事에 제수되어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52세(1810년)에 7월에 校理를 제수받았다. 그해 9월에는 司憲府 持平으로 옮겼다가 이내 掌令으로 승진했다. 그해 겨울에 우레가 울리자, 주상에게 선비의 기풍을 바르게 하고, 사치를금하며, 지방 관료를 잘 선택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라는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주상은 저자의 견해를 기꺼이 채용했다. 10월에체직되어 돌아갔다가 11월에는 修撰이 되었다가, 그 다음달에는 梁山郡守를 제수받았다. 이 때 농민들이 관개 시설의 부족으로 농사에 무척 어려움을 겪는 것을목격하고 봉급을 덜어 수리하도록 조치했다.
한편 이 무렵에 接慰官으로 萊館에 갔다가 일본인 村士玉水(원문에는玉水村士로 되어 있음)가 편찬한 「退溪書抄」을 얻게 되어 陶山書院으로 보내었다.
55세(1813년)에는 執義로 옮겨졌는데, 양산 고을 주민들은 떠나는 것을 만류하며아쉬워했다. 이에 어사 金學淳은 어진 지방 행정 치적을 칭찬하는 장계를 올렸다. 그 해 12월에는 修撰이 되었다.
56세(1814년)에는 持平과 修撰을 거쳐 校理에 제수되었는데, 안동에 이르러 사직상소를 올릴 때에 남쪽 변방의 경비를 강화할 것 등의 내용도 아울러 제시하였다.
57세(1815년)에는 執義 및 校理를 거쳐 侍講院 弼善에 임명되었다.
58세(1816년)에는 校理, 奉常寺正, 副應敎에임명되었다. 그 해 9월에는 주상에게 聖學에 주력하라는 상소문을올렸다. 이어 그 해 12월에 修撰이 되어 주상의 옥체가불편하자 신하로서 정성을 다해 섬겼다.
59세(1817년)에 司諫, 執義, 修撰으로자리를 옮겼다.
60세(1818년)에는 紹修書院에서 釋菜禮를 올리고 藏書閣을 이건, 서적을 거두어 들여도산서원의 院規에 의거하여 서적을 서원 문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李野淳ㆍ李仁行ㆍ柳晦文ㆍ金熙周등과 향음주례를 행하고, 講座를 설치하여 먼저 이황의 「上沈方伯書」를 읽고, 이어 「東銘」ㆍ「西銘」을 강론하였다.
楚山府使가 되어서는 그곳에서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제도를 혁신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방안을 세우고 실천한바, 고을 사람들은 多樂嶺에 興學碑를 세워 업적을 기렸다.
65세(1823년)에는 大司諫에 임명되어 길을 떠나자, 주민들은 길을 막고 그대로 더머물러 주기를 청했다. 이어 承政院 同副承旨를 거쳐 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66세(1824년)에 關西 暗行御使로 임명되어 지나는 고을마다 지닌 폐단을 척결했다.
73세(1831년)에는 이황의 養眞庵 터를 수축하고, 이어 작은 집을 지었는데 이황의싯구에서 문자를 취해 草草庵이라 이름짓고 서책을 정리해 두고 후손들을 가르쳤다.
76세(1834년)에 純祖께서 승하하자 이듬해 인산일에 상경하던 도중 영주에서 落馬하여 부득이 귀가하였다.
80세(1838년)에 嘉善大夫가 되었으며, 兵曹參判을 제수받았다. 그 후, 2년 뒤 82세(1840년)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3년 뒤 1843년 憲宗이 관원을 보내어 致祭하였다.
●해제
초초암집(草草庵集)
초초암 李泰淳의 문집. 3권 3책(본집 2권, 부록 1권). 석인본.
序文은 없으며, 1980년에 저자의7대손 相燮이 쓴 「後識」에 간행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자질이 총명하고영특하여, 어려서는 가정의 가르침을 따라 독실하게 공부하였고, 벼슬에나아가서는 忠義를 다하였고, 특히 4차례에 걸쳐 올린 사직상소문은 말이 엄정하고 의리가 올발랐다.
저자에게 있어서 글을 짓는 일은 餘事일 뿐, 평소 撰述家로 자처하지않았기 때문에 남아있는 원고가 많지 않았을 뿐더러 연이은 삼난으로 태반이나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나마남아있던 것들도 화재로 타버려 후손으로서 애통함을 느끼고, 세대가 점점 멀어져 숨은 덕망이 사라져버릴것을 염려한 相燮이 族祖 源胤氏와 함께 남아있던 원고를 수합하여 모두 4책으로 간행하였다.
본 해제에서 다루는 「초초암집」은 모두 3책임을 밝혀둔다.
권1에는 화운한 다수의 시와 만시,상소문 6편(雷動求言疏 1편ㆍ辭弘文館校理疏 1편ㆍ辭弘文館副應敎疏 3편, 辭弘文館修撰疏 1편), 서간문 23편(金熙周 5편ㆍ李秉進 4편ㆍ李秉遠 6편ㆍ李氏 1편ㆍ姜氏 1편ㆍ李學秀 4편ㆍ李文稷 1편ㆍ李寅在 1편), 제문 3편(外舅僉樞姜公ㆍ閑坪柳進士ㆍ金婿),책문 2편(問天道難知亦難言也ㆍ問學校所以尊祀先聖敎養人士也國家設敎之義顧不重歟)이 실려 있다.
권2는 잡저로 「北征錄」이다. 권3은 부록으로, 만사 35편, 제문 28편, 葬事時道會日記, 행장(李晩燾), 묘갈명(金興洛), 後識(李相燮)가 실려 있다.
저자는 禮安의 선비이며 관료이다. 가학으로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여어려서부터 유가적 인물 형상을 구비하여 정직하고 어진 선비로서 소임을 다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지방 백성들의 현안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현안을 척결하는 어진 목민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가 북평사 역할을 수행하면서 남긴 「북정록」은 매우 주목된다. 이는 紀行文學과 山水文學의 가치를 지니며 북방의 민속 등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상소문이나 책문 등에서 수준 높은 성리학 관련 학문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