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말 발생한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요동케 한 ‘세계대전’이었다. 전쟁피해국인 조선의 입장에서는 건국 후 200여년 만에 발생한 민족의 일대 수난이었고, 사회전반에 급속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는데 의병이 큰 역할을 했음은 異論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의병에 대한 연구는 임진왜란이 일본의 일방적인승전이었다는 종래의 그릇된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주제이며 동시에 당시 향촌사회의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관심을끌었고, 임진왜란 연구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의병운동은 적의 후방에서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낙동강전선을 사수하고 곡창 전라도를 지켜냄으로써 국난극복의 轉機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의 의병운동보다 주목을 받았다. 이를 통해 경상도 의병의 활약상과 의병 조직, 의병활동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 등 다양한 측면이 밝혀졌다. 그런데 기존 연구들은 저명한의병장이나 의병활동에 치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었고, 경상우도에 비해 경상좌도 의병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소략하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이는 전쟁사적인 측면에서 유명 의병장이나 경상우도 의병 활동이 중요한의미를 갖고 있는데서 기인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경상도 의병에 대한 종합적이고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는 경상우도 못지않게 경상좌도의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가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와 좌도가 갖는 전략적 의미의 차이는 일본군의 전략, 곡창지대인 호남과 연결되어 있는 경상우도의 지리적 위치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경상우도는 전쟁 초기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반면, 경상좌도의 대부분 지역은 적의주력이 통과하고 주둔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경상우도 의병은 적의 예봉을 피하는 한편 전라도로 진격하는일본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경상좌도 의병은 주요 근거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패퇴시키는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임이었다.
하지만 경상좌도는 북상한 일본군의 후방보급로였으며, 전쟁 막바지까지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저항하던 지역이었다. 경상좌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패퇴시켰던의병들의 활동은 일본군의 충원과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력을 약화시켰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경상좌도 의병들의 활동은 그 규모나 戰功, 전쟁사적 비중과는상관없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戰況의 변화, 일본군의 動態에 따른 경상좌도의병의 활동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경상좌도 의병 활동의 큰 성과인 영천성 및 경주성 수복과안동 의병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의 주둔 거점인 唐橋에 대한 공략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이 세 가지의사례는 모두 전쟁 초기 관군의 일방적인 패퇴와 일본군의 약탈 행위에 저항하는 향토방위 차원의 의병활동에서 출발해서, 각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와 읍성을 공략하고 탈환하는 형태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이는 경상좌도 의병의 활동이나 성격을 잘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고찰 대상 시기도 의병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개전초부터 1593년전반기까지로 제한하였다. 그것은 이 시기 이후의 의병활동, 특히명군 참전 이후 의병의 주된 역할이 명나라 군대의 接濟라는 형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어 경상좌도 의병 활동이 갖는 성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우선 경상좌도 의병장의 인적 구성과 의병대장과 예하 의병장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폈다. 이를 통해의병의 사회적, 학문적, 경제적 기반을 살피고, 또 각 의병장들의 연합 관계를 통해 임란 이전의 진관체제와 의병장의 활동 범위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찰하였다. 다음으로는 의병과 관군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기존 연구에서는 관군지휘부와 의병장 사이의 갈등 및 알력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해 왔다. 그러나 경상좌도의 경우 그러한 알력이없지는 않았지만, 상호 협력하고 보완하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측면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에서 관군 지휘부와 의병장의 관계를 접근하였다. 이는기존의 의병 연구가 임진왜란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는 인식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의병에대비하여 초라하게 보이는 관군의 존재로 인해 당시 조선 국가의 무능과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의 부재라는 측면을 과장되게 하는 그릇된 역사인식을 낳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왕조의 대응이나 위기 관리 능력에 대해 새롭게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경상좌도 의병의 활동 양상
1) 전쟁 초기의 향토방위 활동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같은 무장들을 선두로 한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첨사와 동래부사가 이끄는 우리측 군사들을 차례로 격파한 이후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않고 북상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은 신속한 북상을 위해 경상도 지역 주요 상경로 중에서 일본 사신들이경우하던 中路를 이용하거나, 낙동강 하류를 건너지 않고 북상할 수 있는 경상좌도의 左路를 이용하였다. 즉 고니시 휘하의 일본군 제1군은 부산, 동래 함락 후 좌수영-기장-양산-밀양-청도- 대구-인동-선산-상주-조문경-조령-충주로 이동하였고, 가토의 제2군은 양산-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비안-용궁-문경-조령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침략한 지 20여일 만인 5월 3일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20여 일만에 도성이 함락되는 상황에서 관군은 아무런 역할도하지 못했다. 이들은 적이 다가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와해되었다. 일본군은「無人之境」처럼 쉽게 주요 지역을점령하였고, 이곳에 일부 부대를 잔류시키고 주력부대는 북상하였다. 5월들어서는 후속부대를 상륙시켜 경주, 영천, 밀양, 대구, 성주, 현풍, 선산, 개령, 김산, 상주 등 경상도 주요지역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경상도에 잔류한 부대는 인근 지역을 약탈하면서 민간에 큰 피해를 입혔다.그리고 그 피해는 경상좌도가 더 심했다. 당시 경상도 초유사였던 김성일의 다음 장계는 그러한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적은 대부대가 서울로 떠난 뒤에 잔여 왜적이 혹은 1백여 명, 혹은 50∼60명씩 부대를 편성하여 곳곳에 屯聚하고 있습니다.星州城을 점거하고 있는 적은 고작 40∼50명 뿐인데도 우리 병사가감히 그 소굴을 엿보지 못하며 왜적이 牧使·판관이라고 자칭하고 관곡을 나누어 주니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고있습니다.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선이 혹은 1백여 척, 혹은 수십 척씩이나 강을 뒤덮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데 이는 모두 약탈한 물건을 운송하는 배들입니다. 또 한 떼의 적들이 左道의 경주·영천·新寧·義興·군위·의성·안동 등지를 경유하면서 도처마다 함락하는데 감히 적의 銳鋒을감당할 수 없어 좌·우도의 길이 끊어졌으니 지금은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도에 침범한 왜적의 한 패는 김해·창원·右兵營·漆原 등지를 약탈하여 소굴로 삼고, 또 한 패는 沿海의 여러 섬에 출몰하니 여러 鎭堡의 모든 장수들은 왜적을 바라만 보고 겁을 먹어 앞다투어 도망하여육지로 나왔으므로 바다의 군영이 일체 텅 비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피해를 더욱 심각하게 했던 것은 민심의 이반이었다. 임진왜란전부터 가혹한 부역 동원에 시달리던 일반민들은 일본군의 진격과 함께 그들에 투항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성주에서는叛民이 일본군의 향도 역할을 맡았고, 상주의 경우 일본군의 절반 정도가 조선의 백성이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반 정도 섞여 있어 낯이 익숙한 자들은 종이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왜적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근래 왜놈들이 중도에 주둔하면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으면서 날마다 약탈하여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었다.
위의 자료와 같이,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주변일대를 노략질하였다. 이에 따라 산간 일대에 피신해있던 주민들, 특히 사족들이 이들의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으로 가장한 농민들은 주변 지리에 익숙하였으므로 이들에 의한 피해가 더욱 컸다.
그러나 일본군의 진격로에 있었던 경상좌도의 경우, 일본군의 공격과약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즉 군사를 조직하여 맞대응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일본군의 약탈에대한 섣부른 반격이 오히려 가혹한 보복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촌락 단위의 개별적 항쟁은 일시적인 것에불과하여 도리어 일본군의 혹심한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고, 이러한 경우 사족의 피해는 더욱 극심하였다.
두 번째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한 지역의 경우인데, 섣불리 일본군을도발하여 더 큰 화를 입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경상좌도의 산골과 바닷가의 10여 고을은 일본군의 진격 방향과는 조금 달라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때문에섣부르게 군사를 일으키면 오히려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여, 이들의 노략질을 피해 숨어있을 뿐이었다.
세 번째는 일본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일부 세력들이 일본군에 대한 항쟁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姜霔와 全湜이 鄭範禮와 더불어 外書 白也院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크게 전과를 올리자, 상주성의 일본군은 근처를 급습하여 혹심한 보복을 자행하였다. 이에品官 卞有慶 등은 이것이 정범례 때문이라고 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을 공격하는일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수효도 많지않고 굶주려 있는 왜놈 같으면 强弩手 10여 명만 있으면 일거에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이가 없어, 사람들은 모두 山谷 사이에숨어있을 분 속할 곳이 없다. 그저 빈주먹만 휘두르며 긴 탄식만 할 뿐’인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과 약탈로부터 피난지를방어하는 것이 요구되었으며 사족 주도 의병의 단초가 여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좌도 의병의 기병은우도에 비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제한 조건을 가진 경상좌도의 의병 활동의 실례를 우선 영천 지역을 통해 살펴보겠다. 4월 21일 경주부에 무혈입성한 가토 군은 80여 리를 이틀 만에 행군하여 영천에 도착하였다. 그때 元士容의후임군수로 부임한 金潤國은 새로 쌓은 영천읍성을 활용한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그저 풍문만 듣고 놀라서성을 버리고 높이 900M의 기룡산에 있는 묘각사로 도주하였다. 이에관군과 백성도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읍성은 적에게 쉽게 함락되었다.가토는 영천성에 약 1,000여명을 남겨 놓고, 신령, 의흥을 거쳐 북상하였다. 영천에 주둔한 일본군은 읍성을 거점으로삼아 사방으로 다니면서 약탈과 살육, 파괴를 일삼았다. 심지어묘를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또 영천군의 人吏와 官屬 등으로 이루어진 200여 명이 결당하여 도적이 되어서, 낮에는 일본군과 내통하고 밤에는도적질을 일삼으며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5월초부터 영천의 여러 지역에서 의병들이 거병하기 시작하였다. 紫陽의 鄭世雅, 鳴山 大田마을의 鄭大任, 新寧의 權應銖 등은 각각 해당 거주 지역의 사족들과 연대해 의병을 일으켰다.이들은 매복과 기습을 통해 노략질하는 일본군과 이에 부용한 조선인을 격퇴하였다. 정세아는柳夢瑞, 曹希謚 등과 함께 영천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노략질하는일본군을 격퇴한 것이 자못 많았다. 鄭大任 의병부대는 5월초정대임을 大將으로 曺誠, 曺德騏, 李枻, 金浩 등을 次將으로 거병하여, 大洞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7월 11일에는 당지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영천군 북편에 있는 당지산은 신녕, 의성으로 통하는 주요길목에 위치해있으며, 영천 읍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매일 왕래하며 노략질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정대임 부대는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와촌에서 영천 읍성으로 복귀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권응수는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禦侮將軍으로경상좌수사 朴泓 의 막하에 있었다. 그러나 박홍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신녕 화산에돌아와 동생 應銓, 李蘊秀 등과 노복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신령 동편에 위치한 한천에서 노략질하던 왜병을 격살하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던, 영천군의 이속과 평소에 불만을 갖고 있던 무뢰한들 200여 명으로구성되어, 낮에는 왜군과 통하고 밤에는 도둑질을 자행하던 토적을 소탕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요로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낙후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성과를 올렸다. 김성일은그의 전공과 지휘 능력을 인정하여 의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유사한 지역이었던 밀양과 대구의 의병역시 위의 지역과 비슷한 사례를 보이고 있다. 울산의 의병도 3개정도의 독자적인 부대가 활동하였다.
한편 안동은 영천과는 달리 한동안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 있었다. 1592년 4월 28일 상주를 점령한 일본군의 일부가 안동을 습격하였으나, 안동 지역 投石軍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일본군은 결국 풍산과다인 일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안동은 한동안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4월 21일 안동부사鄭熙績이 청송으로 피난한 이후 안동부의 행정력은 공백상태였다. 각 창고의 곡식과 군기는 일반 백성들이임의로 탈취하였고, 군병을 징발하고자 하여도 마을이 텅빈 상태였다.
이러한 행정력의 공백을 메우고 안동과 영주 지역의 향토방위태세를 갖추게 된 계기는 安集使 金玏이 내려온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전황을 만회하기 위해 1592년 4월 경상도에 金誠一을 招諭使, 김륵을 안집사로 임명하고, 경상도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1592년 5월 경상도로내려온 김륵은 먼저 고향인 영주(당시는 榮川)에 가서 金蓋國을首將으로 삼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일본군의 죽령진출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의 주력부대는 계속 북쪽으로 올라갔으나 일부 병력은원활한 보급과 상호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후방 요충지에 계속 주둔하면서 군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죽령마저 일본군에게 내어주면 바로 청풍과 충주로 연결되는 한편, 다른 길로는 제천과 원주가 연결되어경상도 북부 지역은 경상좌도의 일본군과 충청도 지역의 일본군의 협공을 받는 형세가 될 수 있었다. 또두 갈래로 나뉜 군대가 서울을 직접 공격할 위험성도 있었다. 이 때문에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죽령을 점령하기 위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죽령으로의 진출을 차단해야 했다. 의병장의 직임을맡은 김개국은 자신의 역량을 잘 발휘하여 이러한 역할을 잘 완수하였다.
김개국은 군사들의 실정과 鄕里의 이점을 살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김개국은의병에 자원한 이들이 대부분 글을 읽던 선비이거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전투병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는 전투할 때에는 병사 수의 많음보다는 정예병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노약자에게는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날렵하고 힘있는이들을 모집하여 전투병으로 활용하였다. 전투방식에 있어서도 의병들은 대부분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이기때문에 적의 진출로 및 수비가 용이한 지역에 매복을 두고 기습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많은 전과를 올리고 일본군의 죽령 진출을 막았다.
영주에 이어 안동으로 온 김륵은 무엇보다 먼저 수령의 피난으로 빚어진 행정 공백을 메우는데 주력하였다.
그래서 수령이 없었던 안동은 前都事 安霽, 前檢閱 金涌, 풍기는 校書博士 黃曙, 의성은 訓練權知 權希舜, 예천은 前縣監 李愈를 모두 假將으로 임명하여 해당 고을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어 예안으로 가서 군대를 소집하고자 하였으나, 군적이 모두 분실되어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각 지역의 사족을 里將에 임명하고, 각기 사는 촌락에서 군사를 모아 일본군의 침략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에호응하여 예안에서는 金垓를 의병대장, 琴應壎을 都揔使로 하고, 李叔樑이 격문을 지어의병 궐기를 호소하였다. 또 趙穆, 琴應夾, 金富倫 등은 군량미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300여 명의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또 춘양현에서는 柳宗介와 任屹이의병을 일으켰다. 안동 등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때의 의병은 관군과 한데 섞어 조직하였고, 굳이 관군이나의병 여부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는 그 지휘권을 관료가 행사하였다. 김륵은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龍宮縣監禹伏龍과 전 判官 趙鵬으로 하여금 용궁과 예천의 군대를 지휘하여 多仁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禮安縣監 申之悌와새로 급제한 權詮에게는 안동과 예안의 군사를 지휘하여 의성 이하의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주와 풍기, 봉화 등의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돕게 하였다. 이 부대에 의병이 섞여 있었다는 것은 신지제가 이끄는 부대에 안동의 사족인 裴寅吉이 속해 있었던 것에서 알수 있다. 그러나 우복룡과 신지제 부대가 용궁에서 패배하였고, 일본군은 6월 22일에는 안동, 7월 1일에는 예안까지 진출하였다. 일시 물러났던 조선군의 반격으로 예안을점령했던 일본군은 7월 9일 안동으로 퇴각하였고, 19일에는 안동에서 물러나 풍산현의 九潭으로 이동하여 10여일간이 지역을 점령하고 노략질을 하였다.
한편 춘양에서 거의했던 류종개 부대는 1592년 7월말 강원도 해안지대에서 소천을 거쳐 재산으로 진입하려는 일본군을 방어하였다.류종개는 김륵의 도움을 받아 버텨보았지만, 척후병의 실수 때문에 본진을 기습당해 패배하고말았다. 류종개와 掌書 尹欽信, 尹欽道 형제 모두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소천을 넘어 예안까지 침략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용궁에서의 우복룡, 신지제 부대, 재산에서의 류종개 부대의 패배는 안동 지역 의병활동이 잠시나마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2) 일본군 주요 주둔지와 읍성 공략
이처럼 전쟁 초기 의병의 활동은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한 소규모, 독자적인의병부대에 의한 유격전투가 주를 이루었다. 주요 공격 대상도 약탈에 나서거나 귀환중인 일본군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력 근거지를 기반으로 한 소규모, 독자적인 부대의운용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군주둔지를 공격, 점령하여 일본군을 퇴각시키지 못하고 그저 소규모 부대를 급습, 공격하는 형태의 전투는, 비록 승리하더라도 이후 세력 근거지와 그인근 지역에 대한 잔인한 보복을 낳을 뿐이었다. 약탈에 나선 일본군의 규모가 단일 의병부대의 능력으로방어하기 어려운 경우 침탈 행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병 규모를 늘리려는시도가 나타났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하나는 몇 차례의 유격전 승리를통한 자신감 회복과 명군의 참전으로 인한 전황의 반전이었다. 다른 하나는 초유사나 안집사로 내려온 김성일과김륵의 노력이다. 양자는 궤산된 관군을 대신해 의병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예봉을 꺾는 한편, 지휘관을 임명하여 관군을 수습, 의병과 합세하여 전투에 참여하도록독려하였다. 이에 경상좌도와 우도 모두 독자적인 의병부대들이 합세하여,하나의 부대를 형성하고 연합작전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 범위도 군현 단위를 넘어섰다. 다만 우도와 달리 경상좌도의 경우는 그 주요 공략 대상이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나 읍성을 공략, 수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일본군 주둔지에 대한 공격이 최초로 이루어진 곳은 永川이었다. 여러차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천지역 의병장들은 1592년 7월이되면서 서로 연합하여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7월 14일의 박연전투였다. 영천 북쪽 신령땅에 위치한 박연은 안계, 의흥, 영천, 하양 등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을 일본군 100여 명이 封庫御史를 사칭하고 신령 쪽으로 향하는 것을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조성 등이 공격하여 승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영천에서 기병했던 3갈래의 부대가 모두 합력하여 일본군을공격, 승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를 기반으로 영천성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영천성공격은 정세아와 정대임 등의 영천 의병부대만으로는 벅찼기 때문에, 권응수와 의흥 의병장 洪天賚에게 원병을청하였다. 이들이 군사를 소집한 날짜는 7월 24일이었다. 이때 참여한 부대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鄭湛의 기록에 의하면, 앞에서 열거했던 영천지역의 세 부대와 함께 신령현감 韓倜, 의흥 의병장 洪天賚, 하양의병장 申海, 하양현감 曺胤坤, 자인 의병장 崔文柄, 경산 의병장 崔大期, 경주부 판관 朴毅長 등이었다. 다시 말해 영천을 주축으로 한 경주, 신녕, 하양, 자인, 의성, 의흥, 흥해, 영일, 대구 등 10여 읍의 의병부대 뿐 아니라, 관군까지 영천성 공략에 참여했던 것이고, 그 총수는 거의 4천명에 육박하였다. 또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동에 있으면서 영천읍성을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군관 변응규를 보내어 권응수를 치하하고 군기와 화약류를 지원하였다.
이들은 일관된 조직체계속에 편제되었고 부대명칭을 倡義精勇軍이라 하였으며, 3개부대로 편제하였다. 총대장은 권응수가 맡고 좌, 우총은 신해와정대임이 맡았다. 그리고 선봉장은 홍천뢰, 별장은 김윤국, 작전참모격인 찬획종사는 정세아와 정담이 맡았다. 아울러 적의 식수보급로를 차단하고 火攻을 위해 마른 나무 등을 준비하는 한편, 적의 동태도 치밀하게 살피는 등 만반의준비를 하였다. 또 권응수는 다른 지역 출신 의병들이 영천 읍성의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싸우기에편한 서북편을 맡게 하고 영천의 의병들은 싸우기가 어려운 동남쪽의 금호강 절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총공세를 단행하여 일본군 600명의 수급을 베는 성과를 올렸고, 7월 27에는 마침내 영천성을 회복하였다.
영천성 수복으로 안동 이하의 경상좌도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은 경주, 영천, 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어 상주지방으로 철수하였고, 영천의 일본군은경주로 후퇴하였다. 이 때문에 류성룡은 “영천성을 수복함으써일본군이 경주성으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이로부터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의 일본군이 모두 일로에 모이게 되고 좌도의 군읍을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영천 일전의 공이다.”라고표현할 정도로, 그 의미를 높게 평가하였다. 심지어 명량해전과함께 가장 통쾌한 승리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영천성 수복과 박연 전투의 승리에 이어 경주에서도 낭보가 있었다. 8월 2일 경주지역 의병대장 金虎, 召募官 朱士豪, 召募有司 崔臣隣(=崔震立)이이끄는 부대가 언양에서 경주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경주 노곡 부근에서 맞닥뜨려, 일본군 50여 명을 참살하고 격퇴하는 승전고를 올린 것이다.
영천성 전투에 이어서 경주부근 노곡 전투에서의 승전에 고무된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에서 경주성 수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때에는 경주, 영천, 울산, 영일, 장기, 흥해, 양산, 언양, 자인 등蚊川會盟에 참여했던 지역의 의병부대와 관군이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판관 박의장을선봉으로 하고, 경주 의병장 최진립 등이 주축을 이룬 경주읍성 탈환 부대는 한 차례 실패를 겪었다. 8월 20일 경주성을 사이에 두고 피아간에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던중에, 경주 동쪽에서 나타난 또다른 일본군의 협공을 당해 패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천 의병장 정세아가 전사하였다.
8월 20일의 경주성 수복전에서주력군만 600여명이 전사하는 등 실패로 그치자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으로 물러나 재차 경주성 탈환을위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때에는 새롭게 개발한 飛擊震天雷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사용되었다. 비격진천뢰는 둥근 쇠구슬(탄환) 안에쇳조각과 인화 물질을 함께 넣어 만든 것으로, 탄환이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탄환 안에 불이 붙어 폭음과함께 폭발하면 날카롭게 만든 쇳조각이 주변의 인명을 살상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보다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주판관 박의장에게 주간에는 기병을 동원해 성 아래에서 무력시위를 하게 하고, 밤에는성 주변의 산봉우리에 횃불을 늘어뜨려 일본군이 성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9월 8일 해가 진 뒤에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경주성을 포위하고 미리준비했던 비격진천뢰를 성안에 쏘아 넣었다. 비격진천뢰가 날아들자 그 성능을 몰랐던 일본군들은 서로 모여들어만지거나 살펴보았고, 그 때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이에 맞아 즉사하는 자가 한번에 2, 30명 씩이나 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였고, 삽시간에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튿날 경주성을 포기하고 서생포 쪽으로 후퇴하였다. 나아가경주읍성 수복 후 얼마 되지 않아 울산성도 수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천성, 경주성과 같이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읍성을 공격하여 수복하는활동과 함께 안동에서는 일본군의 주요 주둔지인 당교를 공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때에도 여러군현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연합작전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수령이나 좌병사 등 관군의 지휘계통이개재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류종개 부대의 패배 이후 안동과 그 일원의의병 거의는 주춤하는 분위기였다. 의병을 모집하여도 응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천읍성 수복으로 경상좌도의 일본군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풍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상주로 철수하였다. 거기에 8월 5일 안동지역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초유사 김성일의 초유문이 배용길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안동과 그 주변지역에서 활발하게 의병이 일어났다.
안집사 김륵은 간절한 말로 의병 거의를 촉구하는 통문을 내는 한편 榮川ㆍ豐基의 선비 金大賢ㆍ郭守智등과 향병을 소집하였다. 또 전 翰林 金垓, 생원 금응훈, 진사 임흘, 생원 李廷栢ㆍ裵龍吉 등이 예안ㆍ안동에서, 전 현감 李愈와 진사 權旭ㆍ李光玉이 醴泉에서 호응하였다. 찰방 趙玹, 생원 李涵ㆍ幼學 白見龍 등이 또한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사이에 申弘道는 義城, 李仁好는 義興에서, 진사 李榮男과 洪瑋는 軍威, 金喜는 比安, 閔根孝ㆍ權季昌은 靑松에서 호응하였다. 물고기 비늘처럼 의병을 일으켜 그 수가 만 명이 되었는데, 모두김해의 통솔을 받았다.
이렇게 안동과 그 인근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8월 20일 일직에서 단일한 의병부대로 통합하였다. 의병부대 명칭은 ‘安東列邑鄕兵’으로하고 안동향교를 陣所로 하였다. 이후 영주의 박록 부대까지 합세함으로써, 안동, 예안, 영주, 군위, 의성, 의흥, 비안, 내성 등 경상좌도의 상당 지역을 포함하고, 인원수도 만 명을 상회하는 대규모 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안동 부사의 협력하에 군량과 군기를 지원받으면서 관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하였다. 초창기에는 안동 등을 침입하는 일본군을 견제하거나 일본군의 소규모 부대에 대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점차 보다 큰 규모의 작전을 행하였다. 1592년 11월 18일 풍기, 영천, 예안, 봉화, 안동 등지의의병을 동원하여 안동부사 김륵의 관군과 함께 예천군 감천에 진을 쳐, 당교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군이예천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부터는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함창 당교에 주둔하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교 함창지역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은 상주 지역 의병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상주와 안동 지역 의병이 동시에 당교의 일본군을 공격했던 것은 우선, 상주 지역 의병에서도 영천, 안동 지역과 같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상주에서는 1592년 10월 정기룡이 상주 假判官으로 임명되면서 관군의 전열을재정비하였다. 이와 함께 세 개의 부대로 활동했던 상주 의병이 점차 개별성과 분산성을 극복하면서 의병상호간또는 관군과의 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기룡이 상주성의 왜적을 대파하고 당교의 적을 의병진과합력으로 공격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안동과 상주의 의병진이 관군과 합동으로 당교의 일본군을 공격했던 것은 이 지역의 일본 주둔군이 양 지역에 매우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교는 당시 수륙 교통이 발달하여 동남북 각 지방으로 이동하기 좋은 교통의요충지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상주 당교와 그 인근 지역에 상당기간 주둔하면서 부근에 있는 고을들을침략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영남 북부지방 여러 고을에서는 당교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소탕하는것이 지역의 안전을 위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게다가 명나라 원군이 참전하고 우리측 군대가 저항을 강화하면서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다. 사태가 이렇게 변하자 그들은 남쪽으로 쫓기는 처지가 되었고, 1592년말에는 일본군 일부가 충주를 거쳐 조령을 넘어 퇴각하였다. 이렇게 조령을 넘어온 일본군은 상당수가 전략적으로중요한 당교에 도착하여 전부터 있던 일본군과 합류하여 진을 치게 되었다.
당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들은 장기전을 시도하면서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이곳의지형조건이 대체로 낮은 구릉지 평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木柵을 많이 축조하여 우리측 공격에 대응하는 한편 인근 지방 침탈의 근거지로 삼았다. 목책은 나무를 다듬어 땅에 박고 이것을 서로 얽어 화살이나 총탄 등을 방어하는 군사시설로서 성곽에 비해 축조하는데 많은 인력이 들거나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당시의 전투에서는 방어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나무 기둥을 땅에 박아 세우고 여기에 다른 나무들을 가로로 층계를 이루어 박고 얽어 그 속에 흙과 짚을 이겨넣어서 굳히면 돌처럼 단단해졌다. 거기에 군데 군데 구멍을 뚫어 놓으면 총포도 쏠 수 있었고, 망루를 만들어 주변을 관찰케 하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이렇게 당교 일대에 굳건한 방어진지를 구축한 다음 붉은 깃발과 흰색 깃발을 동시에 세워 진지의 위엄을더하였다.그런 한편 일본군들은 수시로 인근 고을을 배회하면서 무자비한 침탈을 계속하였다. 예를 들어 1593년 1월 4일에는 예천군 書堂洞에 쳐들어가 노략질한 뒤 마을을 불태웠다. 또 16일 뒤에는 葛坪 지방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정탐하는 한편 분탕질을 가혹하게 자행하여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측 관군과 의병들은 당교와 그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92년 12월 상주 의병의 당교 일본 군병에 대한 기습공격이있었고, 이듬해 1월 1일에는안동 의병장 김해가 복병장 이선충에게 당교를 夜襲하게 하여 많은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힘을 얻은 김해는 그날 감사와 병사를 만나 1월 6일을 기해 인동과 대구, 당교 등 경상좌도 주위에 있는 일본군의주요 주둔지를 관군과 일시에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특히 영천 의병장에서 군공을 인정받아 경상 우후가된 권응수 부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동열읍향병은 의성 이하 4고을의 군영을 점검하여 인동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좌우 부장이 본진(=안동)과 예안의 정병을 이끌고 당교의 일본군을 치기로 하였다. 6일 인동을 공격하기로 한 향병은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지만, 당교를공격한 부대는 관군과 함께 적의 진지에 돌입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또 2월 24일에는 먼저 진천뢰를 터뜨려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한 다음공격하는 수법으로 많은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다. 나아가 李光胤, 예천의병장 李介立, 영주 의병장 김개국 등은 문경에 주둔해 있던 명 제독 李如松에게 빨리 일본군을 공격하자는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이는 명나라 군대가 조령을 넘어 문경에 진주하자, 의병, 관군과 함게 명나라 군대와도 공동 전선을 형성해서 일본군을공격함으로써 성과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4월 28일 일본군이 당교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김해 부대는 그들을 쫓아밀양, 경주까지 추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란 초기의 충격을 극복한 경상좌도의 의병은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과 합력하여 일본군의 주둔지를 집중 공격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전공을 거두면 좀더 큰 규모의 부대와 합력하여, 광범위한지역의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경상좌도 의병의 이러한 활동양상은 전쟁 초기 관군의 궤산과그로 인한 일본군의 점령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였다. 이들의 목적은 향촌 사회를 약탈하고 있는 일본군을축줄하는 데 있었지만, 나아가서는 경상도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북상한 일본군 주력부대의 연결고리를 끊거나경상도 지역의 주요 거점 지역을 분쇄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켜 전황을 유리하게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Ⅲ. 의병장의 구성과 관군과의 관계
1) 의병 지도부의 구성과 성격
의병은 크게 지도부와 군사들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흔히 의병장 ○○○, 혹은 ○○○ 의병 부대라고 할 때, 이 의병이 특정한 사람의 능력이나 활동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여기에는 많은 사족들의 참여와 활동이 전제되어 있는, 말하자면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사족의 연합부대라고할 수 있다. 연합부대란 한 지역의 사족들이 함께 창의에 참여하거나,또는 여러 지역에서 각기 군사를 모집하여 특정인의 휘하에 가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잘 보여주는 것이 김해를 대장으로 한 ‘安東列邑鄕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