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1649년(인조 27).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거(舜擧) 호는 양일당(養一堂).
승지(承旨)를 지낸 오재(梧齋) 신지제(申之悌)의 종제(從弟)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목욕재계 후 북두칠성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호읍(號泣)하다 혼절하기도 하였으며 최질(衰絰)을 풀지 않고 집상(執喪)하는 등 효행(孝行)이 높아서 신지익과 사촌 신협(申鋏) 아들 신심(申鐔)과 함께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솔골 삼효각(三孝閣)에 1703년(숙종 29) 효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손자 신응태(申應泰)는 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사서제요도설(四書提要圖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공(公)에 대한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었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