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 土民 전진원 직접 축조한 귀미洑, 360년간 후세의 물 걱정을 덜게 하다 벼슬생활 대부분 外職 각별한 애민정신 지녀 火賊 엄히 다스리고 수리시설 대대적 정비 임란땐 왜적토벌 나서
오봉 신지제와 오봉의 7세손 신체인, 오봉의 형 신지효를 배향하고 있는 금산서원(錦山書院·의성군 봉양면 구산리). 신체인이 후학을 양성하고 강학하던 곳(금연정사)으로, 1981년 후손과 유림의 공의로 금산서원으로 승격했다.
오봉(梧峰) 신지제(1562~1624년)는 15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섬시(司贍寺: 닥나무 종이로 만든 지폐인 저화(楮貨)의 발행과 노비의 공포(貢布) 업무를 관장한 조선시대 관청)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벼슬생활의 대부분을 외직(外職)으로 보내며 민생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강직한 성품이었던 그는 광해조의 비정상적인 중앙정치는 멀리하며 지방 근무를 통해 각별한 애민정신으로 화적(火賊)을 다스리고 수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등 남다른 치적을 남긴 인물이다.
◆의리와 신의가 두터웠던 오봉
1562년 의성에서 태어난 오봉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이웃집에 나이 많은 선생이 있었는데, 오봉이 책을 끼고 찾아가 배움을 청하자 늙은 선생은 보지도 않고 밭에서 호미질만 계속했다. 이에 오봉은 울타리 밖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다가 반드시 수업을 받은 이후에야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가곤 했다.
오봉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와 학봉(鶴峰) 김성일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수학했다.
오봉은 어릴 때부터 신의가 두터웠고 심지가 굳었다. 그가 유일재 문하에서 공부할 때 문도들과 함께 산에서 땔감을 구해 서당에 불을 지피곤 했다. 하루는 권태일·박의장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갔는데, 마침 한 노인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 오봉은 벗과 함께 그 노인에게 땔감을 얻으려 했다. 그러자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욕을 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노인을 밀쳤고, 노인이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노인의 아들이 관가에 고소해 밀친 친구가 끌려갔다. 오봉은 다른 벗에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씌울 수 없다”며 함께 관가에 가서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주장했다.
수령이 이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노인의 자식에게 “이 세 명은 훗날 재상감이다. 네 아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 번 용서하도록 해라”며 타일렀고, 오봉 일행에게는 노인의 장례를 함께 치를 것을 명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오봉이 17세 때 절에서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한 시골여성이 절에 와서 깊은 밤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오봉은 엄숙한 얼굴로 “왜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와서는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까. 당신은 음심이 있어서일텐데, 그런 생각을 못이겨 인생을 더럽히려고 하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훈계한 뒤 그 여성을 돌려보냈다.
며칠 뒤 한 남자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오봉은 평소 안면이 없는 사람이기에 찾아온 까닭을 묻자, 남자가 “그대가 큰 덕이 있어 시골여성을 바른 도로 훈계한 것을 들었기에 찾아와서 인사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여성이 오봉의 말에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에게 전말을 이야기한 것이다.
◆도산서원 왕래를 위해 예안현감 자청
오봉은 1589년 4월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그 해 5월 사섬시 직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91년 11월 예안현감에 임명되었다. 오봉은 5년간 예안현감으로 재직했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예안현감을 자청한 것이었다. 예안현감으로 있을 때 수시로 도산을 왕래하면서 많은 사우(士友)와 함께 학문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오봉은 예안지역 유생들에게 거의(擧義)를 촉구하는 격문을 돌렸으며, 예안지역의 의병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04년 10월 오봉이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으로 재직할 때, 선조 임금의 명으로 그 서문을 지은 선조대왕교서가 전한다. 임진란공신책훈교서(壬辰亂功臣策勳敎書)로, 고희(高曦)를 호성(扈聖)공신 3등에 책훈(策勳)하는 이 교서는 고희가 당초에는 명단에 빠져 있다가 신하의 상소로 포함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교서의 글은 오봉이 짓고. 석봉 한호가 글씨를 썼다. 다음은 교서 내용의 일부다.
‘선조(宣祖)께서 말씀하셨다. 아! 슬프도다. 내가 덕이 없고 어두워서 스스로 피하지 못하고 큰 난리를 당하게 되어 오직 너희들 문무제신(文武諸臣)이 서로 도와 나라를 구했으니 수고로움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하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갚음이 있음을 사사로운 정에 끌려서 하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공적인 의리에 말미암은 것이다. … 조정의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논공행상을 할 때 어찌하여 그대가 빠졌는지, 만일 지난번 조정으로부터 상소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옛날 진(晋)의 개자추(介子推)와 같이 면산(綿山)에 숨어 찾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마땅히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정성을 두텁게 하여 그 노고에 보답하는 온정을 베풀어 공훈을 호성공신 3등으로 기록하고, 특히 화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며, 부조묘의 사당을 특별히 세우는 특전을 내리고, 또 벼슬을 한 계급 더해 아들이 없을 때는 생질과 사위에게 계급을 더하여 적장손(嫡長孫)이 대대로 이어받아 그 녹을 잃지 않고 영구히 미치도록 하라 하셨다.’
이 교서에는 선조를 호위하는 데 공을 세운 호성(扈聖)공신을 비롯해, 실제로 싸움에서 공을 세운 선무(宣武)공신, 기타 군공이 있는 원종(原從)공신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오봉은 당시 영의정 서애 류성룡의 노선을 지지, 선조께 진언하다 사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순신에 대한 사형선고를 면하게 할 것, 수군통제사 복권, 수군에 대한 과거시험의 독자성 인정 등을 요청했는데, 이로 인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몰려 위기에 처했으나 결국 올바른 판단임을 인정받아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고향에 귀미보 축조, 인근 7개 동네 360년간 활용
1601년에는 정언과 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이듬해 지평, 성균관 전적,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거쳐 1604년에는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했다. 1613년 창원부사로 부임해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 정대립 등을 토벌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봉은 후진 양성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610년에는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강당을 건립, 학생을 가르쳤다. 오봉 사후(1669년)에 사림에서 그를 경모하기 위한 경현사(景賢祠)를 세웠고, 1702년에 장대서원(藏待書院)으로 승격했다. 이곳에는 오봉 신지제를 비롯해 김광수·이민성·신원록이 배향되었다.
서원이름은 의성현령을 지냈던 여헌 장현광(1554~1637)이 ‘장기어신 대시이용(藏器於身 待時而用)’이라는 현판을 써준 데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공자의 말로 ‘군자는 그릇을 몸에 지니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쓴다’는 의미다.
오봉의 특별한 업적 중 하나는 귀미보(龜尾洑) 축조다. 귀미보는 오봉이 귀미에 입향해 살면서 마을 몽리답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부촌(봉양면 문흥2리) 앞에 저수지를 쌓고 그곳에서 귀미리까지 4㎞에 이르는 관개시설을 만들어 인근 7개 동의 전답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보는 신씨종가에서 관리하며 인근의 동네 주민 1천여호로부터 사용료를 받았다. 귀미보는 1970년대 농지정리사업 전까지 360년간 활용된 수리시설이다.
1610년 9월에 작성된 귀미구보신장도목완의(龜尾舊洑新粧都目完議)에는 귀미보를 오봉이 축조한 사실과 경작면적, 경작자, 보의 운영수칙 등이 기재돼 있다. 이 완의에는 ‘오봉이 귀미에 복거하면서 축조한 것이 길부촌 앞부터이고, 근방에 사는 7개동의 주민이 살 수 있는 관개사업이며, 자자손손 대를 이어 돌아가며 주관해 도감을 역임하고 보를 보완하며 영구히 공유할 것이다. 아랫마을 윗마을이 화합하여 조약을 정하고 조약대로 물을 관리할 것을 완의한다’는 요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오봉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안동과 의성 지역의 의병 유가족 돕기와 직접 양육 등 원호활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는데, 귀미보는 이 사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원호활동 초기에는 자금난을 겪기도 했으나, 귀미보의 사업완성으로 그 수입이 많아 재정이 넉넉해졌던 것이다.
■신지제 약력
△1562년 의성 출생 △1589년 증광문과 급제, 사섬시 직장 △1591년 사헌부 감찰, 예안현감 △1600년 전라도 도사(都事) △1601년 예조좌랑 △1602년 사헌부 지평, 전라도 암행어사 △1604년 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 △1613년 창원부사 △1623년 승정원 동부승지 △1646년 이조참판 증직
불천위 신주를 봉안하고 있는 오봉종택 사당(의성군 봉양면 귀미리).
■‘ 오봉 불천위’이야기
6·25 전쟁땐 사당 앞 마당에 유물 묻어 禍 면해
오봉 불천위제사는 오봉종택(의성군 봉양면 귀미리) 정침 대청에서 지낸다. 비위와 합설로 지낸다. 기일은 음력 1월8일이며, 비위 기일도 같은 날이다. 제사는 자시에 지내다 3년 전부터 기일 오후 8시쯤 시작한다. 제관은 20명 정도. 옛날 많을 때는 150여명이 참례했다고 한다.
오봉 15세 종손 신영균씨(1955년생)는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종택은 비워놓은 상태다. 종손이 종종 들러 관리하며, 인근에 사는 친척이 수시로 종택을 방문해 살피고 있다. 불천위 제사를 위해 기일 하루 전에 종손과 종부 등 가족들이 종택을 찾아 안팎을 청소하고 사당도 청결히 한다. 제수는 대부분 대구에서 준비해오며, 메나 탕 등은 종택에서 마련한다.
종택 내 사당에는 오봉 불천위 신주와 함께 종손의 4대조 신주가 함께 봉안돼 있다. 오봉사당은 오봉의 아들 고송(孤松) 신홍망이 1669년 8월 구(舊) 종택 뒤에 건립했고, 1841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오봉사당에는 감실 없이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6·25전쟁 때 피란 가면서 이 사당 앞 마당에 큰 독을 묻고 그 안에 교지와 고문서 등 유물을 보관했고,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리고 종택은 인민군병원으로 사용됐지만, 사당의 신주나 감실 등은 모두 무사했다. 오봉종가는 ‘연도지기(硏道知機)’를 가훈으로 삼고 있는데, "열심히 학문을 닦아서 세상의 맑은 이치를 아는 사람이 되자"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신지제는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쳤다. 이때 막내 여동생이 돌도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포대기 속에서 우는 것이 매우 애처로웠다. 그 또한 어린 나이로 애통하고 슬펐지만, 항상 거처하는 방안에서 어린 여동생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어린 여동생의 젖동냥을 구하였고, 몸소 보호하고 기르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들은 자들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친구들과의 우정
신지제는 어렸을 때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서 수학하였다. 문도 70명은 산에서 땔감을 가져다 서당에 불을 지폈는데, 하루는 참판(參判) 권태일(權泰一)과 절도사(節度使)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갔었다.
마침 한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고 있었다. 신지제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 땔감을 구걸하였는데,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급기야 욕을 해대었다. 함께간 친구가 화가 나서 노인을 밀쳤는데, 노인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노인의 아들이 관가에 고소하여, 곧 밀친 친구가 체포되었다. 신지제는 친구에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갔으니 한 사람에게 죄를 씌울 수 없다.”라고 하고, 관가에 따라 들어가서 서로 자신이 밀쳤다고 다투었다.
사또가 한참 지켜보다가 노인의 자식에게 “이 세 아이들은 모두 훗날 재상감이다. 네 아비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번 용서하여라.”라고 하고, 아이들에게 노인의 자식과 함께 노인의 장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
아리따운 여성을 매질하다.
신지제는17세에 산속 절에서 독서를 하였다. 하루는 아름다운 시골 여성이 절에 들락거리며, 깊은 밤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여성의 속마음을 짐작하고는 그 여성에게 회초리를 가지고 이리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당신은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와서는 밤이 깊어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나에게 볼일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당신은 시골 여성으로 음흉한 생각과 다른 마음으로 서생을 더럽히려고 하니 어찌 그 죄를 벗어 날 수 있겠소?”라고 하고, 여성을 매질하여 돌려보냈다. 며칠 뒤 한 남자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신지제는 평소 안면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찾아온 까닭을 묻자, 남자가 “공은 성대한 덕이 있어 시골 여성을 바른 도로 훈계한 것을 들었기에 와서 인사하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여성이 공의 말에 감동하여 돌아가서 남편에게 말한 것이었다.
강직한 성품
신지제는 인조반정 때 주르륵 눈물을 흘렸고, 풍류(風流)가 돈독하였지만 자신의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하루는 사람들이 그에게 권세가를 소개 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공은 사양하며 들어주지 않고 그들을 풍자하거나 경계시켰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얼마 뒤 과연 그들은 화를 입었다.
일찍이 사헌부가 화를 입어 장차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공에게 초고를 부탁하였는데, 그 말이 권간(權奸)들에게 저촉되어 동료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그러자 곧 휴가를 청하고[呈告]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의 권세가 매우 높았는데, 공은 근처에 있었지만 6년 동안 한 번도 더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인홍은 마음속으로 공의 정치에 탄복하고 감히 그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