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에는 정권을 잡은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여기에 가담한 정조(鄭造)가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에 왔다가 심원록(尋院錄)에 이름을 쓰고 간 일이 있었다. 이에 신적도는 분개하여 유생들을 인솔하여 그 이름을 칼로 깎아내고는 “인륜을 업신여기는 난적(亂賊)이 어찌 잠시도 유림(儒林)의 반열에 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장면을 보고 들은 자들이 모두 놀랐다.
의병을 일으키다.
1627년 금나라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분연히 일어나며 “임금님의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왕업이 매우 위태로우니 이는 신하가 되어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아갈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각 지방의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서 밤 세워 달려갔지만 적들은 이미 물러났다. 그리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니, 인조가 후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하였다.
1636년에 금나라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신적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용맹을 품은 선비들을 모아서 만 번 죽더라도 앞장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쌍령(雙嶺)이 이미 함락되고 화의(和議)가 곧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로 달려갔다. 눈물을 뿌리며 임금에게 글을 올려 나라를 판 죄를 죄다 아뢰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동계(桐溪) 정온(鄭蘊)․용주(龍洲) 조경(趙絅)과 더불어 통곡하였다. 이미 되돌아와서 한편의 시를 읊조렸다.
욕되게 임님의 성은(盛恩)을 입었으나, 誤被天恩重 신하의 직분 오활(迂闊)하여 도리어 부끄럽네. 還慚臣分疎 옛 동산의 봄은 이미 저물어 가는데, 故園春已晩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는가? 何用更蹰躇
청렴하고 검소한 삶
신적도는 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는데, 특히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는 검소함을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져도 급급하게 생업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와 자식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늙고 병든 노비와 황폐한 밭과 집은 자신이 가졌고, 또한 친척 중에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구휼하였다. 그리고 사람 중에 곤액을 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그를 구제하였다. 한번은 종친 가운데 돌림병에 걸려 죽은 이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서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몸소 장례를 치러줬다.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은거하다.
일찍이 이경석(李景奭)이 “신적도는 진실로 국가의 충성스럽고 진실 된 신하이니, 마땅히 관리로 발탁해야 합니다.”라고 차자를 올려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공은 “천지가 닫치고, 상하가 거꾸로 인데, 이 어찌 백발에 나아가는 날이 있겠는가?”라하고 탄식하고는 세상에 대해 생각을 단절하고 학산(鶴山) 미곡(薇谷)에 채미헌을 짓고 단정히 앉아 날마다 춘추 서적을 읽으며 울분을 달랬다. 당시 사람들은 “의성 수풀과 골짝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다.”라고 칭찬했다.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仡)
모
:
순천(順天) 박씨(朴氏)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
형제
:
신달도(申達道), 신열도(申悅道)
집안 이력
신적도(申適道)의 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시조는 고려조에 판도판서를 지낸 윤유(允濡)이다. 안렴사(按廉使)를 지낸 신우(申祐)는 여묘 살이 3년에 한 쌍의 대나무가 자란 기이한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조부 신원록(申元祿)은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양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연원(淵源)의 학문을 들었고, 또한 효도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부친 신흘(申仡)은 호가 성은(城隱)이고, 사림에 석망(碩望)을 받았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순천(順天) 박씨(朴氏)로 부위(副尉) 박륜(朴倫)의 딸이이다.
효로 이름난 조부 신원록(申元祿)
조부 신원록은 효행이 뛰어나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적도는 효행으로 뛰어난 조부에 대해 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王考悔堂府君 以孝擧旌贈 遂感吟>
효의 근원 깊은 도의 근원에서 나와, 孝源由出道源深 내려진 임금은혜 강과 바다같이 깊네. 有隕恩波河海深 공문(孔門)의 이름난 효는 증자와 민자건인데, 聖門惟獨曾閔孝 만일 그들과 함께 나셨더라도 효로 뛰어났으리. 若使生幷特許深
스승
: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학파
:
퇴계 학파
배우기를 즐거이 하다
신적도는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재주와 성품은 총명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사물을 대하여 훤히 깨우친 것이 많았고, 장성하여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는데, 은밀하고 간절하게 받아들여 견문이 날로 풍부해졌다. 이윽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강하고 질정을 구하여 거듭 칭찬을 받았다.
뛰어난 식견
신적도는 1605년 향시에 합격하였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그의 시권을 보고 탄식하기를 “의리(義理)가 조리 있고 분명하니 세상의 선비들이 미칠 수 없도다!”라고 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또한 “신적도의 견식(見識)은 그야말로 우리 당의 모범[矜式]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1606년에 막내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와 함께 성균관에 올라 명성이 자자하였다.
자식 교육
신적도는 매번 독서할 때마다 성현들이 강조한 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자식들을 불러 그 구절을 외게 하였고, 또한『중용』,『대학』두 경전에 대해서는 장구(章句)를 좇아 그림을 만들어 자제들에게 읽게 하면서 “너희들이 평소 자신의 잘못을 내버려두면 이는 하등의 사람이 된다.”라고 훈계하였다.
신적도는 성균관에 유학하고 있는 둘째 신채(申埰)에게 ' “사서(四書), 정주서(程朱書), 퇴계서(退溪書)를 깊이 연구하여 국가가 선비를 기르는 뜻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라고 훈계하였고, 또 셋째 신점(申坫)에게 “자사(子思)의『중용』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니 깊이 연구하여 문의(文義)를 깨닫도록 하라.”라고 편지를 보내었다.
호계선생유집(虎溪先生遺集)
『호계선생유집』은 의병장 신적도(申適道: 1574~1663)의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책 권두에는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있고, 권 1에는 시와 만사(輓詞) 13편, 소(疏) 3편, 서(書) 1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2는 「성설(性說)」「용학도후지(庸學圖後識)」「채미헌기(採薇軒記)」외 9편과「잠명(箴銘)」4편,「제문(祭文)」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3,4는「창의록(倡義錄)」을 싣고 있다. 부록 권 5년「유사(遺事)」와 김도화(金道和)가 쓴「행장」과 이돈우(李敦禹)가 지은 봉안문 및 김석유(金奭裕)가 지은「사림통문(士林通文)」,「묘표」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 권 6은 장현광등의 서간문, 제문, 만사 그리고 권말에 신상헌(申相憲)이 쓴 후서(後叙)와 이중구(李中久)가 쓴 발문이 있다.
채미헌기(採薇軒記)
신적도는 「채미헌기」에서, 학산(鶴山) 미곡(薇谷)은 ‘은자(隱者)가 숨을 만한 곳이다.’라고 탄미하고,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출전했다가 화의로 인해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義)로써 피력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일을 언급하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또 다시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 진군했던 일을 말하고, 이때 여기 강화체결로 그 뜻을 펴지 못했던 울분을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소(疏)로써 극언한 후, 이곳 미곡에다 은둔처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