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申祐)는 고려조에 벼슬하여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안렴사라고 한다.
신우는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고,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을 효수천(孝水川)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조
:
신윤유(申允濡)
모
:
성주 이씨(星州 李氏)
집안 이력
신우는 약목 유씨(若木柳氏)와의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 광귀(光貴)이다. 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되었다.
아주신씨 문중에 이름이 있는 인물은 문학군(文學君) 신달도와 그의 형인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 동생인 예조 좌랑 신열도(申悅道)가 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신지제(申之悌)로, 문명이 있어 대과에 급제해 사류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신홍망(申弘望)이다. 신달도의 아들은 점(坫)과 구(坵)인데, 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
가족 이야기
아버지 신윤유(申允濡)는 첫 이름이 원유(元濡)였다. 고려 관직의 종2품인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圖判書) 겸 군기시사(軍器寺事)인데 고려조가 막을 내리니 낙담하여 단밀로 왔다. 공의 충성된 절의를 세상 사람들은 당개(唐介)에 버금간다 하였다. 초하루 보름마다 산 마루에 올라 개경을 마라보고 깊은 한을 풀었기에 산 이름도 망경산(望京山)이라 하였는데 중세에 만경산(萬京山)으로 변경되었다.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공의 묘소가 있는데 실전하였고 용사리에 단을 모아 세사로 봉향하고 있다. 공은 아주 신씨의 의성 입향조이다.
종형인 신적도(申適道, 1574∼1663)는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다. 신적도는 신흘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였으나,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저서에는『호계집(虎溪集)』이 있다. 이 책은 후손 신상하(申相夏)·신돈식(申敦植) 등이 간행하였다. 서(書)는 정구·장현광·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종제 신열도(1589∼1659)는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나재(懶齋). 수(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의 원록(元綠)이고, 아버지는 흘(仡)이며, 어머니는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딸이다.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선사지(仙槎志)』와 『문소지(聞韶志)』가 있다.
향사:속수서원. 검암서원학파:퇴계 학파
스승, 배움 이야기 등신우는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에게 대의(大義)를 들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사위인 길재(吉再)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 상주 만경산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친구간으로서 조선이 개국된 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퇴재실기
『퇴재실기』는 신돈식(申敦植) 등이 편찬하고, 1908년에 간행된 2권 1책의 활자본이다. 권1에는 부록으로 묘표(墓表)·수갈고유문(豎碣告由文)·속수서원봉안문(洓水書院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속원봉안시고묘문(洓院奉安時告墓文)·고유손우재선생문(告由孫愚齋先生文)·상주사림통문(尙州士林通文)·속원경현사상량문(洓院景賢祠上樑文)·경현사기(景賢祠記)·제쌍죽도(題雙竹圖)·사적(事蹟)·여묘도(廬墓圖)·정려도(旌閭圖)·밀성지(密城誌) 등을 수록하였다. 권2에 부후손조두문적(附後孫俎頭文蹟) 17편을 수록하였다. 책머리에는 1908년에 김도화(金道和)와 17세손 신돈식이 쓴 서문과 신씨세계(申氏世系)가 있고, 책 끝에 유도헌(柳道獻)의 발문이 실려 있다.
상주 관할의 단밀현(丹密縣) 곁에 자그마한 돌비석 하나가 길 왼편에 서 있는데, 거기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마을이름이 새겨져 있다. 옛 어른들이 서로 전하기를 안렴사(按廉使) 신공(申公)이 살던 마을이라고 하며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은 그 비석에 경의를 표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우(祐)이고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장령(掌令)에 이르렀으며,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낸 적이 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탐문하며 수령들의 잘잘못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안렴사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때의 극선(極選)이었다. 공은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윤유(允濡)가 졸하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부(光富)와 광귀(光貴)이다. 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름이 사렴(士廉)과 사빈(士贇)이며, 사렴은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그의 현손인 원록(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旌閭)되었다. 공의 8세손으로 지금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있는 달도(達道)씨는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벗이다.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몇 백 년이 지난 데다 의관(衣冠)을 파묻은 곳이 살고 있는데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인 사포(蛇浦)의 태향(兌向) 언덕에 있는데, 묘도(墓道)에 표지가 없고 자손들이 또 먼 곳에 흩어져 살아 묘역을 살펴보는 것조차 제때에 할 수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드디어 민몰되어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묘위에 올라가게 될 경우, 비록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곳을 알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더구나 탁월한 선조의 행적이 장차 민몰되어 전해지지 않게 된다면, 이 어찌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족형인 승지공(承旨公)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이미 나와 여러 동종(同宗)들과 더불어 비석으로 쓸 돌을 뜨고 빗돌받침을 마련해 놓았으나 미처 세워지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공이 해 주는 한마디 말을 얻어 비석에 새겨 선조의 덕이 후세에 드러나게 되기를 원하니, 그렇게 해 준다면 그 은혜가 아주 클 것입니다. 이에 감히 절을 하고 청하는 바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안렴공의 효성은 이미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에 퍼져서 혁혁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 어찌 거칠고 졸렬한 나의 글이 있어야만 전해지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상주 고을의 말학(末學)이고 공에게는 외예(外裔)가 된다. 그러니 의리에 있어서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이에 드디어 가장(家狀)을 상고해 위와 같이 서술한다. 조정에서 역임한 관직의 차서 및 집안에서 거처할 적의 행의(行誼)에 대해서는 연대가 이미 멀어서 문적(文籍)을 상고해 증험할 수 없기에 상세하게 쓰지 못한다. 그 후손들은 아주 많아서 역시 다 기록할 수 없기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재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는, 문학군(文學君) 신달도가 있고, 그의 형인 적도(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으로 있으며, 동생인 열도(悅道)는 예조좌랑으로 있다. 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지제(之悌)로 문명이 있어 대과에 급제해 사류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름이 홍망(弘望)이며, 문학군의 아들 이름은 점구(坫坵)인데 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적지 않을 것이니, 신씨의 복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만년토록 영원히 자손과 복을 주리라[君子萬年, 永錫祚胤].”라고 하였으니, 공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