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국학연구회(이사장 신후식)가 보물급 ‘왕지(王旨)’를 발굴해 지난 1일 문경문화원 ‘국학고문서전 5’에 전시했다. 이번에 전시된 왕지는 ‘신우위신호위 보승섭호군자 지정사년사월이십구일(申祐爲神虎衛 保勝攝護軍者 至正四年四月二十九日’이다.
1344년(고려 충혜왕 5년) 4월 29일 신우(申祐)를 2군 6위의 두 번째 군단인 신호위(神虎衛)의 향촌사회 부유한 계층 출신 보군인 보승(保勝) 직무대리 호군(攝護軍)에 임명한 내용이다.
왕지는 고려 때부터 조선 태종 때까지 임금이 내리는 분부를 기록한 것이다. 그 중 현재 보물로 지정된 6개의 왕지는 모두 조선조 초기 것들이다.
따라서 이 왕지는 고려시대 것이라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세종 때부터는 이런 문서를 교지(敎旨), 조선조 말 대한제국 시기에는 칙명(勅命)이라 했다.
신우(申祐)는 아주신씨(鵝洲申氏) 의성 입향조로 부인은 약목유씨(若木柳氏)다. 고려 충혜왕 때 무과에 급제해 봉상(奉常), 사헌부 장령(掌令),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정몽주에게 영향을 받아 고려 멸망 후 조카사위인 길재(吉再)와 같이 고향에 은거했고, 조선 태조가 형조판서에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의 행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록’에 실려 있고 ‘퇴재선생실기(退齋先生實紀)’ 문집 2권이 있다.
묘소는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고, 의성군 단밀면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돼 있다.
의성군 단밀면 주선리에 있는 유허비각에는 3개의 비가 있으며 정경세가 묘표를, 김응조가 봉안문을, 채제공이 유허비명을 지었다.
◆원나라 문자가 새겨진 고려시대 문서
고려시대에 작성된 원본 문서는 하나하나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문서의 수가 적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는 발견만으로도 큰 관심을 받는다. 특히 1344년(충목왕 즉위) 4월29일에 신우(申祐)라는 인물에게 왕이 내린 관직 임명장이 알려졌을 때, 우리 학계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때까지 고려 말에 발급된 왕지(王旨)의 원본이 발견된 적은 없었고, 문서의 외형도 깔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몇년 후 이 문서를 면밀히 검토해 온 일본인 소장학자 가와니시 유야(川西裕也) 박사는 이 문서에 찍힌 인장을 판독하여 학계에 알렸다. 발견 당시부터 문서에 찍힌 붉은색 인장은 또렷하였지만, 국내에서는 판독해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가와니시 박사에 따르면 이 문서에 찍힌 인장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때 창안된 팍파(’Phags-pa, 八思巴) 문자로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이라고 새겨진 인장이었다. 고려말 원(元)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르기까지 확장된 세계 제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고려는 원 황실의 부마국이라는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 황제가 고려국왕에게 ‘부마국왕금인’을 내려준 사실이 ‘고려사’와 ‘원사’(元史)에도 기술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부마국이라는 특수한 시기에 작성된 다른 고려 말 문서들로 확대될 아주 중요한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