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선생 신도비 서두에 “先生諱之悌, 字順夫, 梧峯號也. 申氏系出鵝洲, 高麗版圖判書諱允濡其始祖也. 生諱祐全羅道按廉使, 有孝行旌閭, 曾祖諱翰, 贈掌隷院判决事, 祖諱應奎, 贈工曹參判, 考諱夢得贈左承旨, 妣贈淑夫人月城朴氏敏樹女, 嘉靖壬戌七月辛丑生先生” 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번역하면 선생의 휘(諱)는 지제(之悌)요 자(字)는 순부(順夫)이며 호(號)는 오봉(梧峯)이다. 신씨(申氏)의 세계(世系)는 아주(鵝洲)에서 나왔는데, 고려(高麗)의 판도판서(版圖判書) 휘윤유(允濡)가 그 시조(始祖)이다. 윤유의 아들인 휘 우(祐)는 전라도(全羅道)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증조의휘는 한(翰)이니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决事)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응규(應奎)이니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몽득(夢得)이니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된 월성 박씨(月城朴氏)이며 민수(敏樹)의 따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연구는 비명(문)을 통해 오봉공의 상계(上系)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아주신씨(鵝洲申氏) 종파 주장
1) 초기 파보발간 배경 및 내용
아주신씨(鵝洲申氏)는 문헌의 이설(異說)로 인해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진 신익휴(申益休)를시조로 주장하는 계통과 고려조에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신영미(申英美)를 시조로 내세우는 계통이 있다.
최근에 중간된 《아주신씨본원록(鵝洲申氏本源錄)》에는신익휴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아주신씨 대종회는 아주신씨의 근원에 대하여 권지호장 신영미를 시조로하는 일부 가첩(家牒)도 있지만, 가첩은 전기전파(轉記傳播) 과정에서여러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온전히 믿을 것은 못되고, 다른 여러 자료와 새로 발굴되는 자료를연계시켜 연구 검토할 때 참작할 자료는 될 수 있다며, 1819년(순조 19년)에 안동파(安東派)에서 최초로 편찬한 아주신씨 족보의 효시인 기묘보(己卯譜)에 아주신씨의 상계(上系)를평산신씨(平山申氏)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비조(鼻祖)로 삼고, 그 12세손 신익휴를 분관(分貫) 1세조로하여 발간하여 그 후 각 파보(派譜)를 발간할 때 안동파보(安東派譜)의 예에 따라 "아주신씨는평산신씨에서 분관되었음을 밝혀왔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신익휴가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고려후기의 학자 신현(申賢: 1298~1377)의 언행을 모아엮었다는 책인 《화해사전(華海師全)》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있다. 그러나 《화해사전》에서 중요한 유학자로 받드는 신현이라는 인물은 다른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편찬 과정을 기술한 원천석(元天錫)의발문(跋文)에서 모순이 드러나고 있고, 고려 말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의 형식ㆍ내용ㆍ표기에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엿보이는 등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들로 인해 조선 후기에 쓰여진위작(僞作)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2) 평산신씨대종회 의견
평산신씨 대종회는 1972년 수보특별심의위원회(修譜特別審議委員會)를 조직하여 이병도 박사를 비롯해서 당대 최고의 사학자인 김상기(金庠基), 신석호, 양주동, 임창순등에게 《화해사전》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 바 있는데, 한결같이 《화해사전》이 위작이라는 감정 결과를얻고 《화해사전》에 의거한 영해, 울산 및 아주 신씨계의 입록(入錄)은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수보(修譜)시 이를 삭제ㆍ시정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3) 문헌상정의된 가첩(家牒)내용
선조(宣祖) 대의 〈오봉가첩(梧峯家牒)〉과 인조(仁祖) 대의 〈난재가첩(懶齋家牒)〉을비롯해서 아주신씨 각 가정에 보존되어 있는 옛날 가첩에는 모두 호장공(戶長公) 영미를 1세로 기록하고 있다.1817년 발간된 《응암실적(鷹巖實蹟)》에도영미를 1세로 기록하고 있다. 영조 때 편찬된 《문헌비고(文獻備考)》와 《전고대방(典故大方)》을 비롯해서 국가에서 편찬된 많은 전적에도 영미를 아주신씨의 시조로 기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 아주신씨(鵝洲申氏) 발상지
아주신씨(鵝洲申氏)의 발상지는 거제도(巨濟島)의 한 지역이다. 이섬의 행정명칭은 거제군(巨濟郡)이었다. 신라 때부터 군(郡)으로불려왔던 큰 고을이었고 여기에 아주현(鵝洲縣), 송변현(松邊縣), 명진현(溟珍縣)이라는 3개의 현이 있었다. 아주현에서는고려조에 와서 성씨제도가 등장하자 신(申)의 성(姓)을 취한 수장(首長)이 등장했는데, 이 사람이 후일 신영미(申英美)로 알려진 아주신씨의 시조였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1924년 발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는 아주신씨의 시조를 신영미로 기록하고 있다.
아주신씨 선대가 남긴 다양한 사적기들에 따르면 아주신씨의 상계(上系)는 다음과 같다.
1세 신영미는고려에서 권지호장(權知戶長)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웃대는 삼국시대부터 아주지역에 호족으로 거주하여 왔던 것으로 여느 지방 호족과 마찬가지로 성이 없었는데 고려조에들어와서 성을 갖게 되었다. 성을 가진 후 토착지역 아주를 본관으로 삼았고 향직인 호장을 수임했다. 2세 진승(晋升)의 관직은산원동정(散員同正), 3세 득창(得昌)의 관직은 영동정(令同正)이다. 4세 윤유(允濡)는 판도판서(版圖判書)와좌승선(左承宣)을 역임했다.《동사찬(東史纂)》에 의하면 본래 이름이 원유(元濡)인데 충선왕의 이름자 원(謜)과 같아 대신에 윤(允)의글자를 썼다고 한다. 5세 우(祐)는 봉상대부사헌부장령(奉常大夫司憲府掌令),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을 역임했다. 《여지승람(輿地勝覺)》에 의하면 고려말 혼탁한 세상사에서 스스로 몸가짐에 조심했고물러나서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진력하였다 한다. 순조 25년(1825) 신체인(申體仁)이쓴 사적기(事蹟記)에는 아주신씨의 시조와 상계 및 우(祐)의 하계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4. 아주신씨(鵝洲申氏) 족보 효시 및 충돌
1) 족보효시
아주신씨(鵝洲申氏) 족보의 효시는 지금으로부터 197년 전인 순조 19년(1819)에안동파(安東派)가 편찬한 기묘보(己卯譜)이다. 이 족보는평산신씨의 시조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을 아주신씨의 비조(鼻祖)로 삼고, 그 13세손 신익휴를 분관(分貫) 1세조로삼아 아주신씨의 상계(上系)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익보(益保)가평산군(平山君)으로, 익휴(益休)가 아주군(鵝洲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평산신씨와 아주신씨가 갈렸다 하고 익휴를 아주신씨의 시조로 정한 것이다.
<아주신씨대종회>는 안동파의 기묘보가 출간된 이후 아주신씨 각 분파에서 파보(派譜)를 발간할 때 안동파보(安東派譜)의 예(例)에 따라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분관되었음을 밝혀왔었다."고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신익휴가 아주신씨의 시조이고 또 평산신씨에서 갈라져 나온 장절공 신숭겸의 후손인가하는 문제는 안동파의 기묘보 출간 이전부터 아주신씨 내에서 커다란 논란이 되어 왔다.
기묘보가 출간되기 2년 전인 정축년(1817)에도와공(陶窩公) 신정주(申鼎周)는 《호서기행록(湖西紀行錄)》을집필하여 “아주의 신은 호장공 이상은 보첩(譜牒)이 전해지지않는데, 아주가 평산과 더불어 장절공에서 함께 나왔다는 말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지만, 믿을만한 자료나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기록을남겼다. 이것은 아주신씨가 평산신씨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이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지만 이 주장은입증되지 않은 것으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평가가 많았음을 전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그러나 1816년 초 청주파의 신극조(申克祚)가 의성의 신정주를 찾아와서 공주에 사는 김노정(金魯定)이 《만성보(萬姓譜)》를저술했는데 그가 활용한 자료들 중에 장절공의 13세 손인 시랑공(侍郞公)이 처음으로 아주군(鵝洲君)에봉해져 자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왔다. 신정주는 이 주장이 신뢰하기 어려운것이라고 보았지만, 의성의 읍구양파(邑龜兩派)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817년 2월 읍구양파에서는 각각 대표 한명씩을 선출해서 공주의 김노정에게 파견하여 족보의 사실 관계를 조사하게 했던것이다. 이때 대표로 선정된 사람이 귀파의 대표 신정주와 읍파의 대표 신치교(申致敎)였다.
두 사람이 김노정을 만나 《만성보(萬姓譜)》와그가 집필에 활용했다는 《씨족원류(氏族原流)》 및 《성원총록(姓苑叢錄)》을 얻어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아주신씨가 평산신씨에서 갈라져나왔으며 아주신씨의 시조가 익휴라는 주장을 입증해주는 증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았다. 《씨족원류(氏族原流)》는 영미를 아주신씨의 시조로 기록했다. 도와공은 《만성보(萬姓譜)》가김노정이 생계를 목적으로 근거 없이 조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안동파에 편지를 보내 그 잘못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철종 11년(1860) 청주파의경신보(庚申譜)와 융희(隆熙) 2년(1908) 읍파(邑派)의 무신보(戊申譜)는 익휴이상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조상 전래의 가첩에 의하여 호장공(戶長公) 영미(英美)를 시조로 하였던 것이다.
2) 족보충돌
20세기 초반까지는영미를 시조로 하는 상계 인식과 평산신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인식이 팽팽이 맞서고 있었는데, 1908년읍파에서 《무신보(戊申譜)》를 발간할 때 익휴를 영미의 부(父)로 기록하면서 이 균형이 무너졌다.
《무신보(戊申譜)》는 아주신씨 최초의 본격적인족보라 할 만한 것인데, 처음에 읍귀양파가 합동하여 족보를 만들려고 했지만, 읍파에서 김노정이 위조한 익휴 이상의 조상으로 하자고 하는데 대하여 귀파가 이에 반대하면서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마침내 읍파 단독으로 발간한 것이다. 그래도 《무신보(戊申譜)》는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서 익휴를 1세로 하지 않고 범례에 “익휴를 1세로 할 것이로되 가장고첩(家藏古牒)에 영미를 시조로 하고 익휴를 1세로 한다.”고 난외에 소자(小字)로기록했다. 그런데 1935년 이후 귀파의 《을해보(乙亥譜)》와 읍파의 《정축보(丁丑譜)》 및 1960년대 발간된 《지재보(智齋譜)》에 이르러서는 모두 익휴를 1세로 하는 기술로 바뀌었다. 《지재보(智齋譜)》를보면 제1세를 익휴로 하고 그 부를 숙으로 하고 숙을 장절공의 11세손인연의 동생으로 하여 평산신씨와 아주신씨의 세계(世系)를 붙여놓았다.
그런데 이 세계 중 익휴는 공주의 협잡인 김노정이 위조한 가공의 인물이다. 숙, 익보, 익휴는 평산신씨 구보(舊譜)뿐만 아니라 아주신씨 족보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 신숙은고려시대 정사인 고려사열전을 위시해서 우리나라 각종 사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로서 평산신씨도 아주신씨도 아닌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결국 이족보는 아주신씨가 평산신씨에 속하려다가 평산신씨도 되지 못하고 고령신씨 후손이 되고 만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연대에 큰 모순이 있다. 평신의 조상인 중명은 윤유의고조의 사촌형에 해당하게 된다. 윤유가 판도판서에 임명된 것은1280년인 충렬왕 6년이고, 중명이 출생한것은 1282년인 충렬왕 8년이다. 고조의 4촌형이 출생하는 것보다2년 전에 판도판서에 임명될 수 있겠는가?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위의 세계가 허위임이증명되는 것이다.
무신보에는 연, 숙을 부자로 하고 있지만 을해보와 정축보 및 지재보는 이 둘을 형제로 만들어놓았다. 불과 30년 사이에 부자관계가 형제관계로 바뀌었는데여기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다.
5. 결언
위와 같은 문헌 고찰을 통해 아주신씨 시조를 신영미로 주장할 수 있으나, 필자가 알지 못한중요한 문헌이 있을 경우 시조 또한 번복이 될 수 있다. 본 연구 과정에서 아주신가 전체 문헌을 검토했다기보다는일부만을 참고했다.
또 오봉종가에서 발행한 족보 상계는 신영미로 되어 있으나, 오봉신선생신도비명(梧峯申先生神道碑銘)에서 “신씨(申氏)의 세계(世系)는 아주(鵝洲)에서 나왔는데, 휘, 윤유(允濡)가 시조(始祖)이다”라고 상반된 기록이 있어 이를 입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다만 오봉공파에서 신도비를 세울 당시 각 종파간 시조가 달리 사용되는 것을 알고, 아주신씨 모두가 인정하는 화합차원에서 기술한 것으로 사료된다.
향후 상계(上系) 관련 연구는 각파 별로 시조를달리 사용하더라도 아주신씨대종회(鵝洲申氏大宗會)에서 시조에관한 논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된다.
수백년간(197년)을 서로의 주장만 펼쳐오면서역사적 확실성을 검증하기 위한 고증도 없이 종인들 간 갈등만 거듭해왔는데 앞으로도 새 세대가 내려가며 어느 쪽이든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계속된다면선대가 걸어온 다툼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본인은 향후 아주신씨 대종회가 주관이 되어 전문가팀을 구성해서역사적인 고증을 거친 후 그 결론으로 시조를 결정짓는 것이 현명하고 올바른 방법이라 생각하면서 이 소고를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