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594년, 선조 27년) 가을 9월 초하루. 상국(相國) 홍이상(洪履祥) 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업무를 보던 초기에 우리 고을을 지나갔는데, 관아의 일이 끝나자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이 고을에 거점을 삼을 만한 험한 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대가 직접 가서 형세를 보고 오도록 하게.” 라고 하였다. 무릇 청량산은 내가 유람하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곳이어서 흔쾌히 그 말을 따랐다.
초2일. 상국 홍이상이 안동에서 비장(裨將) 강효업(康孝業)을 보내며 편지 한 통을 써서 나와 함께 가라고 했다.
초3일. 아침을 일찍 먹고는 강효업이 먼저 출발하고 나는 기중(器仲)과 함께 나란히 갔다. 온계(溫溪)를 경유하여 고산(孤山)에 이르러 금난수(琴蘭秀) 어른을 방문하니 금 어른이 내가 온다는 것을 듣고 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니 퇴계 선생이 쓰신 짧은 시가 절벽 바위에 남아 있었는데, 이는 대개 금 어른이 써놓은 것이었다. 배에서 내려 절벽을 타고 올라가 그 시를 감상하였는데 필적이 분명해서 바로 전날 써놓은 것 같았다. 절벽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가니 금빛 모래와 옥돌이 티끌 하나 없이 정결하여 자리 펴기를 기다리지 않고 앉아서 술을 몇 잔 마시고 일어났다. 대개 고산은 청량산 골짜기 입구이다. 축융(祝融)의 한 줄기는 서쪽으로 나와 시내 앞에서 끝나는데, 황지(黃池)에서 나온 시내가 산 밑둥을 돌아 남쪽 복주(福州)로 흐르는 것은 바로 낙천(落川)이고, 만 길 절벽이 시내 동쪽에 병풍같이 펼쳐져 있는 것은 바로 축융의 꼭대기이다. 시내 서쪽에 있는 것은 고산으로 높고 크지는 않지만 그 위에 소나무 수백 그루를 심고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서 소요하면서 시를 읊조리는 장소로 만들었다. 대(臺)의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인데 수십길 높이에 동쪽의 절벽과 기맥이 이어져 있다. 속언(俗諺)에 이르기를. ‘이것은 옛날에 하나의 산이었고 시내가 고산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용이 그 가운데를 가르고 나오는 바람에 산이 갈라져 두 개로 되면서 한 줄기가 서쪽에 떨어져 나가 외로운 섬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절벽 아래에는 못이 있는데 도영(倒影)이라 이름붙인 것은 고산의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고산의 남쪽에는 동서로 두 절벽이 있는데 모두 푸른 절벽이다. 동쪽의 것은 축융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다 꺾여 다시 서쪽으로 가고, 서쪽의 것은 건지로부터 남쪽으로 가다 꺾여 다시 동쪽으로 간다. 이를 내병(內屛), 외병(外屛)이라 부르는데 이 갈라진 형세는 일동(日洞)에서 모아진다.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그 사이에 못이 있는데 맑고 깨끗해서 월명(月明)이라 한다. 촌가 수십 호가 있고 밭이 수십 이랑 있는데, 그윽하고 한적해서 꼭 방덕공(龐德公) 이 살던 곳 같았다. 금 어른이 정사(精舍) 여러 칸을 지었는데 축융을 등지고 앞으로 고산을 보고 있고, 맑은 시내를 가까이 두고 긴 모래밭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병, 외병이 정사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모양과 같았다. 바위에 기대 돌을 더 보태서 대를 만드니 홰나무가 그 위에 저절로 나서 우거져 있었다. 금 어른은 이 곳을 수양하는 땅으로 삼아서 이제부터 이 땅에서 생을 마치고자 하니 참으로 낙원을 얻은 것이다. 국화 천 포기를 심고 매화 백 그루를 심었으며, 방 안에는 퇴계의 시가 걸려 있고 벽에도 책장에는 책이 가득하였다. 나에게 귀중한 서첩 두 개를 내어 보여주었는데 선생께서 평소에 주고받은 편지와 지으신 글을 모아 귀중하게 보관한 것이었다. 나같이 하잘것없는 몸이 여기에 들어오니 홀연히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금 어른과 배를 타고 상류로 유람하였다. 동벽에 이름을 쓰고 5리쯤 가다가 비를 맞고 촌점에 들어가니 강 비장이 와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금 어른과 강 비장의 선친이 오래 친분이 있던 터라 그 이름을 묻고는 매우 기뻐하고 술을 권하여 취하도록 마셨다. 바로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돌길이 위험해서 말에서 내려 소를 타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어깨에는 도롱이를 걸치고 천천히 걸어가니, 강 비장이 뒤에서 웃으며 말하기를, “소를 탄 사또님 어디로 가십니까? 사람들이 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처음 보이는 몇 봉우리는 연꽃같이 높이 솟아올라 있는데, 소나무, 가로나무, 단풍나무, 등나무가 모여서 푸른 기운을 내뿜는 것 같기도 하고, 흩어져서 안개․구름․노을로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맑은 기운이 사람의 온몸을 휩싸는 것같이 느껴졌다. 연대사(蓮臺寺) 아래 이르니 길가에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는 암석이 솟아 있었는데, 5, 6명이 앉을 만한 곳이어서 내가 먼저 올라가니 동행이 뒤이어 올라왔다. 동자(僮子)에게 산열매를 따오게 하고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니 그제서야 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절에 들어가니 절은 바위 밑을 의지하여 지었는데 그다지 높지도 크지도 않았으며 거처하는 승려도 수십 명이 되지 않았다. 한 승려가 앞에서 인도하였는데 이름이 현칙(玄則)이었다. 절의 남쪽에 연대가 있어서 승려와 나란히 앉아 산의 형세에 대해 물어보니 승려가 절의 왼쪽을 가리키며 금탑(金塔), 오른쪽을 가리키며 연화(蓮花)라 하고 절의 뒤쪽을 가리키며 선학(僊鶴)이라 하였다. 금탑의 뒤에는 경일(擎日)이 있고, 선학의 뒤에는 연적(硯滴), 탁필(卓筆), 자소(紫霄), 자란(紫鸞) 네 봉우리가 있고, 연화봉 바깥쪽으로 내장인(內丈人), 외장인(外丈人), 향로(香爐) 세 봉우리가 있었는데, 암석이 높게 포개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깎여져 마주보고 서 있기도 하고, 돌 위에 흙을 쌓은 것 같기도 하고, 깎아지른 절벽이 깎아지른 절벽을 이고 있기도 하여 절벽을 타고 사다리로 올라야 하는 곳도 있고, 높고 험해서 오를 수 없는 곳도 있었다. 남쪽에 축융이 있는데 크고 험하며 높아서 그 형세가 마치 경일봉, 장인봉의 아버지뻘 되는 것 같고, 금탑, 연화봉의 할아버지뻘 되는 것 같아서 이것과 높고 험함을 다투지 못할 것 같았다. 신재(愼齋) 의 기록에서 그 대개를 보았지만 이제 몸소 와서 둘러보니 기이한 보습, 천만 가지의 기상이 있고, 바위와 절벽, 풀과 나무의 모습은 끝이 없이 다양했다. 잠시 노닐며 감상했는데도 내 몸이 청량한 바람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천길 산 위에서 한번 옷을 털고’라는 구절을 읊고 나서 기중과 운을 나누어 시구를 찾고 있었더니 강 비장이 술이 취해서 말하기를, “제가 무사(武士)이지만 이 사이에 어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자기를 과장하는 말을 늘어놓으니 금 어른이 그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강 비장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얼른 일어나 침소로 들어갔다. 그 다음을 금 어른이 잇고, 나와 기중이 마지막으로 지었다. 저물녘에 지장전(智藏殿)으로 들어갔다. 절은 낡고 승려는 쇠잔하여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오래도록 속세의 일에 속박되어 있다가 이제 산인과 반나절을 한가하게 지내니 그나마 번민을 씻어버릴 만 했다. 기중은 지쳐 잠들고 나만 앉아서 승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시축(詩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시축에는 퇴계 선생의 시 몇 편과 학로(鶴老)의 시 몇 편이 있고 또 달원(達遠)의 시도 있었다. 아 아, 퇴계 선생은 내가 존경하고 흠모하여 배우고자 했던 분이고, 학로 선생은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나 이제 고인이 되었다. 달원은 나의 유익한 벗이요 존경하는 벗으로 나와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이곳을 유람하기로 약속했었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병화(兵禍)가 일어나는 바람에 갑자기 죽었다. 시축 가운데 여러 시들을 보니 사람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시가 있었으며, 한숨 쉬며 탄식하게 하는 시가 있었고, 끝내는 감개하게 하는 시가 있었으니 뒤에 이 시를 보는 사람도 이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며, 동일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일훈(一勳)이라고 하는 승려가 내가 피곤해서 졸려하는 것을 알고 산초차를 끓여와서 권했다. 한 잔을 기분 좋게 마시니 정신이 깨이는 것 같았다. 또 계성(戒聖)이란 승려가 있었다. 가야(佳野)의 상사(上舍) 김공(金公) 의 집을 왕래하면서 상사 공에게 수학할 때 그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나를 기억했으나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가야에서의 일을 헤아려보니 이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죽고, 산 사람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니, 나와 기중이 산중에서 그를 본 것도 운수가 있는 것이었다. 한가하고 적적하여 불경을 펼쳐보니 ‘수릉무차회문(水陵無遮會文)’이란 것이 있었는데 황망하고 기괴하여 한차례 웃음거리도 되지 않았다. 성이 김(金)이요 이름이 수온(守溫)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 관직을 살펴보니 문한(文翰)직의 영광을 누렸는데도, 그 뒤에 발문까지 써서 부처에게 아첨하기에 이르렀으니 명색이 유자(儒者)이고 행동은 묵가를 따르니 이럴 수 있는가. 이는 우리 유도(儒道)의 죄인이다.
초4일. 또 비가 내렸다. 강 비장이 일찍 일어나 산의 형세를 그리라고 재촉하였으나 화공의 솜씨가 매우 졸렬해서 모습이 전혀 닮지 않았으니 매우 우스운 일이다. 고을 사람이 전하는 말에, ‘옛날에 어떤 임금이 산중에 나라를 세우고 험한 곳을 거점으로 삼아 적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도 성곽은 모두 남아 있으나 군데군데 낡고 무너져 있었다. 축융에는 궁궐 터가 있는데 깨진 기와와 무너진 벽이 간혹 수풀 사이에 드러나 있기도 하고 어정(御井)과 육부(六部)를 설치하여 그 자리가 각각 있으며, 남대문(南大門)과 수구문(水口門)이 있었는데 그 자취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축융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모습이 볏단을 쌓아둔 것 같아서 적이 왔을 때 짚자리로 그 위를 덮고 ‘군자(軍資)’라고 속이자 적이 두려워 접근하지 못하고 동현(東峴)까지 왔다가 물러갔다고 하여 옛날에 동현이라고 이름했던 것을 퇴현(退峴)이라 한다. 역사책에 실려 있지 않아서 어느 대 어느 왕 때 어떤 오랑캐를 피해서 여기에 의탁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에 군장이 없었으나 몇 주의 땅으로 왕이라는 칭호를 훔쳐 쓴 것은 이루 셀 수가 없다. 이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일삼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싸우고 정벌하여, 험한 곳을 선점하지 않으면 하루도 나라를 보전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여러 산 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지리적인 잇점이 있으면 모두 나라의 도읍이 되었는데 아마 이것도 그런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해구(海寇)와 가까이 있고 북쪽으로 산이(山夷)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달로(撻虜)가 있어서, 이들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된 것이 오래되었다. 삼한 때 삼면이 적들의 소굴이 되어서 죽이고 정벌하며 싸울 때 적을 막지 못했으나 험한 데 거점을 가진 자들은 공을 많이 세웠음을 볼 수가 있다. 아마 이 일도 그런 것일 것이다. 왕씨가 평정한 뒤로부터 백성들이 편안하게 거처하게 되었고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 이백 년간 백성들이 늙어 죽도록 전쟁을 알지 못하여, 일년내내 즐겁게 노닐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때때로 산에 있는 성곽을 가리키며 괴상하다고 웃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날 섬나라 오랑캐들이 화를 일으켜 하루아침에 병사를 보내니 견고하던 성〔金城湯池〕이 모두 험한 곳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산성을 쌓는 일을 급선무로 삼아 높은 산 위에 가시덤불을 헤치고 언제인지 상고할 수도 없는 시대의 자취를 밟으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조정의 계책에 들어맞겠는가? 세상에는 믿을 만한 것이 있지만 그것이 산의 평탄하고 험한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니 이것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책이 이러한 형편에서 나오니 슬프고도 슬프도다. 강 비장이 먼저 돌아갔다. 그 때 마침 비가 개니 햇빛이 밝고도 고왔다. 동행한 사람들과 지팡이를 짚고 내키는 대로 걸었다. 금탑봉의 허리에 두루 대여섯 개의 암자를 볼 수 있는데 치원암(致遠庵)이라는 곳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곳이고, 총명수(聰明水)라는 것은 고운 최치원이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함을 함양했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선이므로 반드시 이 산을 지나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여기서 독서하고 총명수를 마셔서 총명함을 함양했다는 일은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다. 기중이 그 물을 가리키며, “마셔보게. 마시면 사람이 총명해 진다네.” 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남자는 저절로 이목이 총명한데 어찌 이 물을 마신 뒤에야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안중암(安中庵)이라 하는 곳이 있는데 노파의 모습을 흙으로 작게 만들어놓고는 그 이름을 ‘안중’이라 하고 그것으로 암자의 이름을 삼았다. 쇠로 소도 만들고 쟁기도 만들어서 그 앞에 나란히 두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안중은 고운 최치원을 위해 밥을 지어주었고, 군량미를 위해 밭을 갈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고운에게 밥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는 꼭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사람들에게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나라를 돕는 것을 권하는 것이다. 당시를 상고해보면 이치를 헤아려 볼 수 있지만 그러한 후에 후대의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겨 불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상고 시대에 불교를 숭상하던 때에 생긴 일이 아니겠는가? 동쪽으로 돌아 내려오니 상청량(上淸凉)․하청량(下淸凉)․극일(克一) 등 여러 암자가 있었는데 모두 살고 있는 승려가 없어서 집과 문과 담이 낡고 무너진 채로 있었다. 금 어른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여기서 삼 년 동안 책을 읽었다.” 라고 하였다. 대체로 청량산에는 열두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에는 스물네 개의 암자가 있다. 각각 기이하고 특이한 모습이 있으니 반드시 연적봉 꼭대기에서 지팡이로 기대 서고 축융의 남쪽 꼭대기에서 옷을 떨치고, 만월암(滿月庵), 백운암(白雲巖) 등의 암자에서 아무 세상 근심 없이 편히 누워 본 뒤에라야 기이한 것을 다 찾아보고 경치를 모아본 것이라 하겠다. 내 눈과 귀를 맑게 씻고, 내 가슴을 트이게 하니 천년이 지난 지금 공자께서 노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천하를 작게 여기셨던 기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일에 쫓기고 바빠서 두루 유람할 겨를이 없어서 산을 내려가자니 마음이 쓸쓸해졌다.내가 기중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맘이 좋지 않군.” 라고 하니, 기중이, “나도 그렇다네.” 라고 하였다. 옛날에 안정공(安定公)이 형산(衡山)을 지나면서 산에 올라 관람하지 못했고, 회암(晦庵)은 언덕에 가까이 이르렀어도 두루 유람할 겨를이 없었으니 옛날과 지금의 어질고 어리석음이 같지 않지만 그 당시에도 유람할 겨를이 없다는 생각은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저물어 다시 고산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금 어른은 먼저 돌아가고 나와 기중이 뒤따라갔다. 이날은 또 작은 고깃배를 마련해서 두 척을 묶어 못에 띄우니 석양이 밝게 비치며 산수가 아름다웠다. 잠시 후 삼〔麻〕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다가 혹 뜸하다가 하며 못에 어지러이 떨어졌다. 도롱이를 제치고 모자도 벗어서 흠뻑 젖도록 둔 채 술을 따르고 산열매를 늘어놓고 밤이 깊도록 한가롭게 읊다가 술에 취해서 정사(精舍)에 들어가 서로 베고 누워 잤다. 한밤중에 강에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렁이는데 물결 소리가 창 가까이에 어지럽게 울렸으니 이것도 기이한 일이었다. 금 어른이 불을 켜고 나를 부르며 일어나라고 했다. 옆에 작은 항아리에 갓 익은 술이 있어 동자를 시켜 따르게 하니 많이 따르기도 하고, 조금 따르기도 했는데 따르는 대로 마셨다. 고기잡는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게 해서 삶게 하기도 하고 회를 치게도 하여 밤과 대추를 내오게 하니 참으로 신선의 풍취와 맛이었다. 술이 좀 오르자 서책을 내와서 펼쳐 보니 거기에는 금 어른의 죽은 아들인 각(恪)이 어릴 때 쓴 문장이 있었는데, 그 재주는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안타깝구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도다.
초5일. 일찍 일어났다. 하늘이 맑게 개어 햇빛이 못에 가득 비치니 황홀하여 수정(水晶)의 지경에 있는 것 같고 그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아아! 지금은 어떤 때이며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눈을 드니 강하(江河)의 기이함이 들어왔으나 산림(山林)의 흥취는 다시 일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만 알지 내가 명승지에 와서 감회가 더하는 것은 알지 못하리라. 금 어른이 비록 세상일을 잊지는 못했지만 이런 곳이 있었고 아울러 이런 즐거움이 있으니, 내가 향리(鄕里)의 소인배들에게 허리를 굽히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누가 더 나은 것일까? 금 어른과 기중이 배 위에서 나를 배웅했다. 무릇 중국의 명산이 하나가 아닐진대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일어나게 하는 산을 묻는다면 형산과 여산(廬山)이라 할 것이니, 남헌(南軒) , 회암(晦庵) 두 선생께서 두 산을 다니며 완상하시고 이를 드러내 알리셨다. 우리나라의 명산이 하나가 아닐진대 사람에게 존경심이 일으키는 산은 청량산으로 퇴계(退溪) 선생께서 그 아래 거처하시면서 평생에 왕래하면서 유람하고 완상하셨으니, 모든 바위와 골짜기에는 아직도 지팡이를 짚고 다닌 자취가 남아 있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읊조리고 남은 빛이 있다. 열두 봉우리를 바라보니 우뚝하여 미칠 수 없는 것이 있고,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아주 웅장하여 돌아가 의지할 만한 것이 있고, 단아하고 장엄하며 엄정하고 굳세어 우러러 존경할 만한 것도 있다. 그 준엄한 것이 나약한 사람에게는 자립할 수 있게 하고, 맑고 깨끗함은 탐욕한 사람에게 청렴하게 하니 내가 청량산을 사랑함은 산 하나만을 사랑할 뿐만이 아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물이 이름나는 것은 깊이 때문이 아니니 용이 있으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이름이 나고, 산이 이름나는 것은 높이 때문이 아니니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난다.”
라고 했으니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다. 내가 어려서 영가(永嘉)에서 공부하면서 한번 유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한 지가 5년이었고, 돌아가 서로 그 아름다운 소문은 들었으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십 년간은 과거 공부에 빠져 있었고, 오래지 않아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했고, 또 허황된 명성에 사로잡혀 꿈결속에서나 때때로 산을 왕래했던 것이다. 신묘년(1591년, 선조 24년) 가을에 나는 선성(宣城)에 부임해 왔다. 산이 비록 안동에 있지만 실은 예안(禮安) 땅에 있으므로 사람들은 예안을 ‘산수(山水)의 고을’이라 한다. 현에 온 지 4년 만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늘 방안에서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산수를 즐길 분수가 없구나.” 라고 중얼거리다가 이제 비록 하루 동안 유람을 했지만 즐겁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아아! 보잘것없는 이 몸이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여 형산이나 여산에 남녀(藍輿)를 타고 가지 못하고, 우리나라에 나서 늙어서나마 청량산의 남은 향기를 잇지 못하고 돌아가니, 오늘 이후로 산을 좇은 지 삼십 년이다. 어리석은 나는 궁벽한 곳에 있으면서 갈팡질팡하며 어디로 돌아갈까. 풍진 세상살이는 울적하고 하려던 일은 어그러졌으며 사숙하려던 뜻도 이미 잘못되었다. 청량산이 이런 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겠는가? 이번 산행에 기중과 주고받은 시 약간편을 함께 기록하여 뒷날 기억에 대비한다. 다만 그 뜻이 그다지 즐겁지 않으니 어찌 바쁜 와중에 마음이 얽매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을날에 쓰다.
홍이상(洪履祥) -- 1549년∼1615년, 호는 모당(慕堂). 선조 12에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저서로 《모당유고》가 있음. 방덕공(龐德公) -- 후한 말의 은자(隱者). 신재(愼齋) -- 주세붕(周世鵬)의 호. 상사(上舍) --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를 높여 부르던 말. 김공(金公) -- 김언기(金彦璣)를 말함. 호는 유일재(惟一齋). 남헌(南軒) -- 장식(張栻)